대우조선해양 영업부서 회의에서 한 직원이 손을 들었다. "배에 스크린 골프장을 설치하는 건 어떨까요? 선원들의 복지를 중시하는 선주들도 적지 않은 것 같던데…." 예전 같으면 한가한 소리 한다고 면박을 당했겠지만 이번엔 달랐다. "괜찮은 생각인데 한번 검토해 보세요. "

요즘 들어 조선업체 영업담당 부서들의 회의가 잦아졌다. 선박 발주는 뚝 끊겼는데 뾰족한 대안은 없기 때문이다. 회의 분위기도 달라졌다. 경쟁업체의 수주 실적을 놓고 다그치던 목소리는 줄어들었다. 어차피 다른 업체도 손을 놓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대신 새로운 아이디어에 대한 압박이 거세다. 조선업체는 요즘 상상력 경연장이다.

◆불황이 아이디어를 낳다

현대중공업은 지난달 사내 디자인연구소에 'SOS'를 쳤다. 선주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묘안이 없느냐는 것.과거에는 선박의 효율과 기능에만 주목했지만 이젠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에서다. 디자인연구소는 즉각 새로운 선실 디자인으로 화답했다. 침대와 책상 등의 배치를 싹 바꾸고 칙칙했던 소파와 침대시트,벽면 등의 색깔을 아이보리 톤으로 화사하게 개조했다. 회사 영업팀 관계자는 "새로운 선실 디자인을 선주들에게 보여준 결과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말했다.

삼성중공업 영업팀은 아예 선박의 구조를 완전히 뜯어고쳐 새로운 수요를 끌어내는 방안을 논의 중이다. 지구상에 없는 신개념 선박을 내놓자는 것.'복합 선박'이 하나의 대안이다. 예를 들어 유조선과 컨테이너선의 기능을 합치면 시너지 효과가 크다. 지금까지 유조선은 기름을 싣고 가서 내려놓은 뒤에는 맹물을 채워 되돌아왔다. 컨테이너를 실을 수 있는 공간을 유조선에 마련하면 돌아올 때도 '기름값'을 하게 된다.

삼성중공업 관계자는 "순수한 아이디어 차원에서 오가던 얘기가 요즘은 훨씬 가시화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STX조선은 해적에 대한 선주들의 걱정을 타깃으로 삼았다. 선박에 '선실 계단 폐쇄 덮개'를 설치한 새로운 디자인을 선보였다. 유사시 선박에 설치된 계단 통로를 신속하게 봉쇄함으로써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선실 구역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장치다. STX조선은 이 장치를 갖춘 선실 디자인을 최근 특허 출원하기도 했다.

◆영업팀 인력조정도

작년 상반기까지만 해도 선실 디자인이나 선원용 위락시설 등은 조선회사 영업팀의 관심영역 밖이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선박 성능과 건조 기술 만으로도 충분히 장사가 됐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위기로 선박금융 시장이 얼어붙고,이로 인해 선박 주문이 뚝 끊기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매달 300만~400만CGT(보정총톤수)를 웃돌던 전 세계 선박 발주량이 10만CGT 수준으로 급감했다. 그나마 중 · 소형 선박이 대부분이라 지난 4월엔 대형 선박에 강점이 있는 한국 조선회사들은 단 한 척의 배도 수주하지 못했다.

특히 컨테이너선 유조선 LNG선 등 상선(商船) 부문의 불황이 심각하다. 해양플랜트 쪽에서는 간간이 희소식이 들리지만 상선 부문은 손가락만 빤 지 오래됐다. 이로 인해 영업팀 내에서도 인력 조정이 일어나는 분위기다.

대형 조선업체 영업팀 관계자는 "최근에 상선쪽 인력 3명이 해양플랜트 영업부문으로 넘어갔다"며 "그동안 직원들 월급은 우리가 책임진다는 자부심으로 살았던 상선 영업맨들의 사기가 최근 들어 많이 꺾였다"고 말했다.

그동안 '돈이 안된다'고 큰 신경을 쓰지 않았던 특수선 분야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중 · 소형 조선사 몫이라고 제쳐뒀던 선주들도 하나둘 챙기기 시작했다. 잇달아 회사채를 발행할 정도로 조선업계 자금흐름이 원활하지 않기 때문이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수익성이나 조선소 작업효율 등을 따지기엔 상황이 너무 급박하다"며 "요즘엔 병원선 급수선 등 아프리카 오지에 주로 쓰이는 중 · 소형 선박 시장까지도 들여다보고 있다"고 말했다.

안재석 기자 yag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