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인도 · 아리아어에서 유래한'~의 땅'이란 의미의 단어 '스탄'은 서방 세계에서는 일종의 '골칫거리'다. 아프간인의 땅,파크인의 땅이란 뜻의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에서 진행되고 있는 테러와의 전쟁은 베트남전처럼 '끝이 없는' 수렁이 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서방 세계가 직면한 상대는 종교적 신념으로 무장한 탈레반(이슬람근본주의 정치 · 무장조직).아프가니스탄 권좌에서 축출되며 사라진 듯 보였던 탈레반은 최근 파키스탄의 수도 인근까지 진군하며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파키스탄의 핵무기가 탈레반의 손에 넘어갈 수 있다는 우려가 현실로 다가오면서 세계가 중앙아시아의 정세 변화에 주목하고 있다.

◆파키스탄 · 탈레반 전면전… 대탈출 러시

탈레반은 미국의 대(對) 아프간 전쟁으로 아프간 권좌에서 축출된 뒤 한동안 뉴스에서 사라지는 듯했다. 2007년 샘물교회 아프간 선교단 납치 사건으로 다시 국내 언론의 주목을 받았지만 다시 기억 속에서 희미해졌다. 그랬던 탈레반이 최근 이웃 파키스탄에서 급부상하며 세계의 이목을 끌고 있다. 파키스탄이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를 탈취할 가능성까지 제기되면서 미국의 대외정책 과제 1순위로 떠올랐다.

8일 파이낸셜타임스(FT) 등 외신에 따르면 파키스탄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북서쪽으로 160㎞가량 떨어진 스와트 지역은 파키스탄 · 탈레반 간 전면전으로 아비규환의 장이 됐다. 파키스탄 정부군의 총 공세와 민간인을 방패막이로 삼아 결사항전하는 탈레반,지역 주민들의 대탈출 등 전쟁은 국지전을 넘어 전면전 양상으로 확대되는 모습이다. 스와트 지역은 파키스탄 정부가 탈레반 문제 해결능력을 평가받는 상징적인 지역이 되면서 파키스탄도 탈레반도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 됐다.

파키스탄 정부군은 지난 5일부터 헬리콥터와 탱크 등을 동원,대대적인 공격을 퍼붓고 있는 중이다.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 파키스탄 대통령은 지난 6일 미 워싱턴에서 오바마 대통령과 만나 "알 카에다와 그 동맹세력(탈레반)을 격파하는 데 참여하겠다"며 탈레반 척결에 공동 대응키로 전의를 다졌다. 같은 시기 미국을 방문한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간 대통령과 '반(反) 탈레반' 3자 협조체제도 구축했다. 파키스탄 군은 7일 화력을 총동원해 탈레반 은신처로 추정되는 건물 등에 집중 포격을 가했으며 스와트 중심도시인 밍고라 진입도 시도했다.

소개령이 내려진 스와트에선 주민들의 엑소더스(대탈출)가 이어지고 있다. 이미 밍고라에서만 20만명 이상이 피난길에 올랐으며 총 50만명의 주민들이 스와트를 벗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이 와중에 탈레반은 도로를 바위와 나무로 막아 민간인의 피란로를 차단하며 민간인을 인질로 삼아 결사 항전하고 있다. 유엔 관계자는 "스와트 대탈출은 8만명이 사망한 카슈미르 대지진에 필적하는 대재앙"이라고 말했다.

◆美 세계전략 생사걸린 핵심지역

오랫동안 외부 세계에 생소했던 스와트 지역이 이슬람 근본주의와 서방세계가 충돌하는 상징이 된 계기는 이 지역을 지난 2월 탈레반이 접수하면서부터다. 2년여간 군사작전을 펴고도 탈레반을 축출하지 못한 파키스탄 정부가 탈레반의 일방적 요구를 수용하며 휴전을 선택하면서 사태가 꼬였다. 탈레반과의 대결에서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파키스탄 정부군은 전투다운 전투 한번 못해보고 퇴각을 반복하면서 탈레반의 실체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탈레반은 스와트 지역에 안주하지 않고 파키스탄 수도 이슬라마바드 부근 100㎞ 지점 부네르까지 진출하면서 이슬람권의 대국 파키스탄이 탈레반에 접수될 수 있다는 악몽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탈레반의 부상에 가장 놀란 것은 미국.'제2의 베트남'이라 불리는 아프간에서 고군분투하던 미국으로선 순식간에 배후와 보급기지가 차단될 위협에 처하게 됐다. 여기에 파키스탄이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가 탈레반에 넘어갈 경우 사태는 통제불능으로 빠져들 수 있는 위험이 현실화됐다. 이미 파키스탄에 120억달러나 원조한 미국으로선 파키스탄이 잘못되면 아프간과 파키스탄 두 곳에서 과거 중국의 공산화나 베트남전 패배,이란 호메이니 정권 등장에 비견되는 대형 대외정책 실패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부라부랴 미국은 파키스탄에 강경대응을 주문했다. 일각에선 미군이 이 지역에 직접 개입하는 초강경 방안까지 거론됐다. 이후 파키스탄 정부는 지난주 이슬라마바드 부근의 탈레반 장악 지역인 부네르와 디르로 진격했고,스와트까지 공격하고 나섰다. 미국은 이어 8일 이웃 아프간 수도 카불 주둔 사령관에 아프간전 개입 이래 처음으로 3성 장군인 데이비드 로드 중장을 임명,중앙아시아 지역에 대한 관심을 표명했다.

미 국방부는 2010년도 국방예산안에서 무인정찰기나 헬리콥터 등 대테러 전쟁에서 수요가 많은 장비의 조달비를 증액하는 등 국방정책의 초점을 테러전에 맞췄다.

하지만 전망은 여전히 안개 속이다. 파키스탄 내 여론이 무능하고 부패한 현 정부를 좋아하지 않는 데다 탈레반과의 전쟁도 미국의 이익을 위한 것이란 인식이 강하기 때문이다.

또 "파키스탄 군 간부 상당수가 탈레반에 동조하고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국민다수가 탈레반에 동정적이라는 점도 걸림돌이다. 앞으로 2~3주가 탈레반이 국제정치 무대에서 사라질지,아니면 파키스탄이 '제2의 베트남''제2의 쿠바'가 될지 판가름 날 것으로 보인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