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흥망의 '다윈코드'] (9) 조선·건설 공급과잉은 '전략적 퇴화'를 몰랐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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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송장벌레의 생존술
송장벌레는 까만 바탕에 붉은 무늬를 가진 딱정벌레의 일종이다. 이름이 송장벌레인 이유는 썩은 고기를 먹고 살기 때문이다. 자기 몸집보다 수백배나 더 큰 생쥐 시체 같은 것도 용케 끌고 와서 새끼들에게 먹인다. 유충이 알에서 부화하면 송장벌레 아비와 어미는 먹이를 먼저 먹어 소화시킨 다음 토해내서 몰려든 유충들에게 먹인다.
그런데 송장벌레 부모가 찾아내는 고기의 크기는 매번 다르다. 둥지에서 떨어진 아기 새도 있고 생쥐처럼 꽤 큰 생물도 있다. 반면 송장벌레가 낳는 알의 수는 매번 비슷하다. 고깃 덩어리가 작으면 유충 중 일부는 먹을 게 없다. 송장벌레는 이런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까.
답은 '살해'다. 송장벌레는 알이 부화하면 놓여 있는 먹이의 크기만큼을 빼고 나머지를 먹어치운다. 그리고 나머지 유충을 정성껏 보살핀다. 인간들은 제우스의 아버지 크로노스가 자식들을 잡아 먹었다거나 스파르타인들이 약한 아이를 죽인 일을 끔찍하게 생각하지만 자연에서의 '영아살해'는 그다지 드문 일이 아니다.
고릴라나 침팬지들은 더 강한 수컷이 약한 수컷의 새끼들을 죽인다. 새들이 여러 개의 알을 낳으면 이 중 먼저 부화한 큰 녀석이 다른 알들을 둥지 밖으로 떨어뜨려 버리기도 한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는 간단하다. 생존을 위해 개체수를 조절하는 것이다.
◆부나방같은 기업들
하지만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은 가끔 이런 원리를 잊는다. 공급과잉으로 스스로를 위기에 빠뜨린 조선업계나 건설업계가 단적인 예다. 국내 조선업계는 2000년대 들어 엄청난 호황을 누렸다. 낡은 선박의 교체 시기가 된 데다 중국 인도 등의 경제 규모가 성장하면서 원자재 · 상품을 실어나를 배가 많이 필요해진 것이 첫째 원인이었다. 한국의 선박 수출은 2001년 이후 8년간 연평균 22.7%씩 증가해 2008년에는 432억달러어치에 이르렀다.
선박 수주 증가는 조선경기 활황으로 이어졌다. 한번 지으면 부수기 어려운 시설투자임에도 불구하고 워낙 경기가 호황이다 보니 너도 나도 조선소를 짓는 데 뛰어들었다.
하지만 공급 과잉의 징조는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선박을 만들어 본 적도 없는 회사들이 국제시장에서 수주를 해왔고 계약서를 근거로 은행에서 돈을 빌렸다.
이런 와중에 글로벌 경제위기가 선박 수요를 급감시키며 잔뜩 부풀어 오른 조선경기의 거품을 터뜨렸다. 신규 수주는커녕 기존 수주계약도 취소되는 일이 드물지 않게 됐다. 자연히 수주 잔고도 지난해 3분기 말부터 감소세로 돌아섰다. 은행에서 빌린 돈을 갚기 어려워진 중소 조선사들이 하나둘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이미 C&중공업,대한조선,진세조선,녹봉조선,YS중공업,세코중공업,TKS 등이 워크아웃이나 퇴출 대상에 올랐다.
건설업계 역시 미분양 아파트가 15만가구에 이를 때까지 공급을 멈추지 않았다. 분양가를 낮춰 수요층을 넓히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충북 충주,경북 구미 등 지방 중소도시에서 평당 600만~700만원대 아파트가 분양됐다. 공급이 수요를 넘어갔고 어느 순간부터 갑작스레 미분양 아파트가 쌓이기 시작했다. 지금 지방에는 마이너스 프리미엄이 수천만원에 이르는 단지가 수두룩하다. H건설 관계자는 "고급 아파트의 이익률이 높은 데다 소비자 눈높이가 높아졌다는 생각에 너도 나도 비싼 고급 아파트를 전국 곳곳에 지었다"며 "지금의 미분양 사태는 어느 정도 예견됐던 것"이라고 말했다.
◆남의 패도 봐라
경기는 순환한다. 호황기에 많이 팔릴 줄 알고 만들어 놓은 제품이 불황기에는 덜 팔려 재고로 남아 기업의 목을 조른다. 어느 분야가 돈이 된다,어느 기업이 돈을 번다는 이야기가 들리면 더 많은 경쟁자가 나타나 이익을 나눠먹으려 한다. 이는 시장에 참가한 다수 기업들이 담합을 하지 않고 제각각 움직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시장경제의 움직임이긴 하다.
문제는 주변 환경이나 경기 사이클을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일을 벌이고 보는 이런 움직임들이 언젠가 기업의 발목을 잡는다는 데 있다. 잠시만 눈을 옆으로 돌려 시장의 흐름을 살펴보면 알아차릴 수 있는데도 '우리는 괜찮겠지'하는 안일한 판단과 욕심이 기업을 파국으로 몰고 간다.
이는 기업이 전략적으로 '퇴화'할 수 있느냐의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유정식 인퓨처컨설팅 대표는 "성장도 중요하지만 진화론적 관점에서 볼 때 가장 중요한 경영 키워드는 생존"이라며 "때로는 전략적인 퇴화가 경쟁력을 키운다"고 말했다. 기생충은 생존과 생식에 필요한 최소한의 기능만 유지한 채 나머지는 과감히 삭제하는 방향으로 진화(혹은 퇴화)했다. 그들의 개체수는 독립적인 생명체들의 네 배에 달한다.
스스로 유충의 개체수를 줄여 생존을 도모하는 송장벌레의 길을 따르지 않는다면,남의 패를 미리 읽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비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녹슨 조선소와 텅빈 미분양 아파트의 행렬이 10년 후,20년 후에도 재연될 게 분명해 보인다.
이상은 기자 selee@hankyung.com
그런데 송장벌레 부모가 찾아내는 고기의 크기는 매번 다르다. 둥지에서 떨어진 아기 새도 있고 생쥐처럼 꽤 큰 생물도 있다. 반면 송장벌레가 낳는 알의 수는 매번 비슷하다. 고깃 덩어리가 작으면 유충 중 일부는 먹을 게 없다. 송장벌레는 이런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까.
답은 '살해'다. 송장벌레는 알이 부화하면 놓여 있는 먹이의 크기만큼을 빼고 나머지를 먹어치운다. 그리고 나머지 유충을 정성껏 보살핀다. 인간들은 제우스의 아버지 크로노스가 자식들을 잡아 먹었다거나 스파르타인들이 약한 아이를 죽인 일을 끔찍하게 생각하지만 자연에서의 '영아살해'는 그다지 드문 일이 아니다.
고릴라나 침팬지들은 더 강한 수컷이 약한 수컷의 새끼들을 죽인다. 새들이 여러 개의 알을 낳으면 이 중 먼저 부화한 큰 녀석이 다른 알들을 둥지 밖으로 떨어뜨려 버리기도 한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는 간단하다. 생존을 위해 개체수를 조절하는 것이다.
◆부나방같은 기업들
하지만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은 가끔 이런 원리를 잊는다. 공급과잉으로 스스로를 위기에 빠뜨린 조선업계나 건설업계가 단적인 예다. 국내 조선업계는 2000년대 들어 엄청난 호황을 누렸다. 낡은 선박의 교체 시기가 된 데다 중국 인도 등의 경제 규모가 성장하면서 원자재 · 상품을 실어나를 배가 많이 필요해진 것이 첫째 원인이었다. 한국의 선박 수출은 2001년 이후 8년간 연평균 22.7%씩 증가해 2008년에는 432억달러어치에 이르렀다.
선박 수주 증가는 조선경기 활황으로 이어졌다. 한번 지으면 부수기 어려운 시설투자임에도 불구하고 워낙 경기가 호황이다 보니 너도 나도 조선소를 짓는 데 뛰어들었다.
하지만 공급 과잉의 징조는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선박을 만들어 본 적도 없는 회사들이 국제시장에서 수주를 해왔고 계약서를 근거로 은행에서 돈을 빌렸다.
이런 와중에 글로벌 경제위기가 선박 수요를 급감시키며 잔뜩 부풀어 오른 조선경기의 거품을 터뜨렸다. 신규 수주는커녕 기존 수주계약도 취소되는 일이 드물지 않게 됐다. 자연히 수주 잔고도 지난해 3분기 말부터 감소세로 돌아섰다. 은행에서 빌린 돈을 갚기 어려워진 중소 조선사들이 하나둘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이미 C&중공업,대한조선,진세조선,녹봉조선,YS중공업,세코중공업,TKS 등이 워크아웃이나 퇴출 대상에 올랐다.
건설업계 역시 미분양 아파트가 15만가구에 이를 때까지 공급을 멈추지 않았다. 분양가를 낮춰 수요층을 넓히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충북 충주,경북 구미 등 지방 중소도시에서 평당 600만~700만원대 아파트가 분양됐다. 공급이 수요를 넘어갔고 어느 순간부터 갑작스레 미분양 아파트가 쌓이기 시작했다. 지금 지방에는 마이너스 프리미엄이 수천만원에 이르는 단지가 수두룩하다. H건설 관계자는 "고급 아파트의 이익률이 높은 데다 소비자 눈높이가 높아졌다는 생각에 너도 나도 비싼 고급 아파트를 전국 곳곳에 지었다"며 "지금의 미분양 사태는 어느 정도 예견됐던 것"이라고 말했다.
◆남의 패도 봐라
경기는 순환한다. 호황기에 많이 팔릴 줄 알고 만들어 놓은 제품이 불황기에는 덜 팔려 재고로 남아 기업의 목을 조른다. 어느 분야가 돈이 된다,어느 기업이 돈을 번다는 이야기가 들리면 더 많은 경쟁자가 나타나 이익을 나눠먹으려 한다. 이는 시장에 참가한 다수 기업들이 담합을 하지 않고 제각각 움직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시장경제의 움직임이긴 하다.
문제는 주변 환경이나 경기 사이클을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일을 벌이고 보는 이런 움직임들이 언젠가 기업의 발목을 잡는다는 데 있다. 잠시만 눈을 옆으로 돌려 시장의 흐름을 살펴보면 알아차릴 수 있는데도 '우리는 괜찮겠지'하는 안일한 판단과 욕심이 기업을 파국으로 몰고 간다.
이는 기업이 전략적으로 '퇴화'할 수 있느냐의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유정식 인퓨처컨설팅 대표는 "성장도 중요하지만 진화론적 관점에서 볼 때 가장 중요한 경영 키워드는 생존"이라며 "때로는 전략적인 퇴화가 경쟁력을 키운다"고 말했다. 기생충은 생존과 생식에 필요한 최소한의 기능만 유지한 채 나머지는 과감히 삭제하는 방향으로 진화(혹은 퇴화)했다. 그들의 개체수는 독립적인 생명체들의 네 배에 달한다.
스스로 유충의 개체수를 줄여 생존을 도모하는 송장벌레의 길을 따르지 않는다면,남의 패를 미리 읽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비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녹슨 조선소와 텅빈 미분양 아파트의 행렬이 10년 후,20년 후에도 재연될 게 분명해 보인다.
이상은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