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범의 유럽문화기행] (10) 이탈리아 로마 베네치아광장‥쾨테의 애틋한 사랑 불발로 끝난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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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마차 한 대가 베네치아 광장에 멈춰 섰다. 로마는 지금 사육제 기간이라 거리는 온통 인파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가면을 쓰거나 분장한 사람들이 통행하는 마차에 아랑곳하지 않고 무질서하게 끼어든다. 인파에 갇힌 앙겔리카 부인의 마차를 발견한 것은 괴테였다. 사육제를 보러 나온 괴테는 뜻밖에 지인을 만나게 되어 반가운 마음으로 달려가 모자를 벗었다. 앙겔리카는 괴테를 향해 다정하게 답례하더니 곧 몸을 뒤로 젖혀 옆에 타고 있던 밀라노의 여인을 보여주었다. 순간 괴테의 눈이 빛난다. 밀라노의 여인은 앙겔리카의 무릎 위로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는 괴테의 손이 가볍게 떨린다. 그런데 그는 차마 그 손에 입을 맞출 수 없었다.
◆영국인 화상 저택에서 밀라노 여인 만나
괴테가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 가을 카스텔 간돌포에 있는 부유한 영국인 화상 젠킨스의 저택에서였다. 젠킨스는 자신의 호화로운 저택에 친구들을 불러들여 즐거운 사교의 시간을 만들었는데 괴테는 그곳에서 로마의 이웃 귀족여인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이 로마 여인은 자신의 친구인 이 밀라노 여인을 그에게 소개시켜 준 것이다. 밀라노 여인은 젠킨스씨가 총애하는 점원의 여동생이었다. 담갈색 머리,푸른 눈에 뽀얀 살결을 한 이 쾌활하고 매력적인 처녀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던 괴테의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세계의 수도인 로마에서 괴테는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는 어떠한 행위도 삼가며 오로지 배움에 전념하기로 다짐했던 터였다. 그러던 그가 처음으로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게 된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우연하게도 괴테는 이웃집 로마 여인,밀라노 여인과 함께 단 셋만 남게 되었다. 그러자 밀라노 여인은 적극적이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려는 자세로 인해 차분하고 조심스러운 로마 여인과 대비되면서 훨씬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뒤늦게 모임에 합류한 앙겔리카 부인은 괴테와 밀라노 여인 사이에 뭔가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눈치챘다. 점심식사 테이블에서 괴테는 앙겔리카와 나란히 앉게 되었는데 괴테의 오른쪽에 밀라노 여인이 스스럼없이 다가와 앉았던 것이다. 앙겔리카는 이 여인의 당돌한 행동에 적잖이 놀랐고 괴테도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나 괴테가 누군가?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연애 9단이 아니던가? 사실 괴테가 당시 독일에서 쉴러보다 훨씬 높은 대중적 인기를 누렸던 것은 그의 연애 기질이 한몫 했다. 연애 경험이 없었던 쉴러의 작품은 낭만적 이상을 간직하긴 했지만 사랑이라는 양념이 빠져 있어 그 작품을 읽기란 마치 기름기 없는 앞다리 스테이크를 씹는 격이었다. 반면에 연애심리 묘사에 발군이었던 괴테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통해 독일 젊은이들을 사로잡으며 그들로 하여금 베르테르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지게 했고 로테와의 이룰 수 없는 사랑에 잠못 이루게 만들었다.
◆약혼 사실 모르고 애정의 불씨 점화
어쨌든 좌우에 어느 한 쪽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여인들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연애박사인 괴테로서도 감당하기 어려운 분명한 '위기'상황이었다. 그러나 답은 명백했다. 지금으로선 누가 봐도 당연히 오랫동안 우정을 지속해 온 앙겔리카에게 좀 더 많은 관심을 보여야 할 상황인 것이다. 괴테는 본심과는 다르게 의도적으로 앙겔리카와 더 많은 대화를 나누려 했다. 대신 밀라노 여인이 말을 걸어 올 때는 상냥하게 대답하면서도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했다. 그렇지만 사려 깊은 앙겔리카는 두 남녀의 대화를 유도하기 위해 오히려 말수를 줄였다. 이날 오찬에서 세 남녀 사이에 이뤄진 대화의 삼중주는 이렇게 엇박자로 시종했다.
저녁 때 정원을 산책하려던 괴테는 마침 테라스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던 로마의 이웃여인과 그녀의 어머니,그리고 밀라노 여인 등 세 여성으로부터 합석 제의를 받았다. 그녀들은 막 혼수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었는데 여러 가지 필요한 물건들을 놓고 검토하는 중이었던 것이다. 화제는 자연스럽게 신랑에 대한 품평으로 옮겨갔다. 그들은 신랑을 호의적으로 평가하긴 했지만 흠을 잡는 '센스'도 잊지 않았다. 괴테도 이 여인들의 대화에 빠져들면서 점점 이 결혼의 주인공이 누구인지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정중히 그녀들에게 신부가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자 세 여인은 왜 다 알고 있는 사실을 묻느냐고 반문했다. 신부는 밀라노 여인이었다.
그토록 사랑스러운 여인이 바로 그 신부라니! 괴테는 영원히 계속되길 바랐던 달콤한 꿈에서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그는 엄청난 실망감과 당혹감을 도저히 감출 수 없었다. 자신의 감정을 가리기 위해선 어떻게 해서든 이 상황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그는 적당히 둘러댄 후 자리를 떴다. 그는 마음의 평정을 찾기 위해 저택을 벗어나 자연을 배회하다가 저녁 늦게야 귀가했다.
◆로마 떠날 때 사랑의 마음 고백
그로부터 두 달 뒤 괴테는 뜻밖의 놀라운 소식을 듣는다. 밀라노 처녀의 약혼자가 약혼을 파기하고 그녀와의 관계를 끊어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충격으로 심한 열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때 상냥하고 다정스레 자신을 따랐던 이 아름다운 처녀가 활달함을 상실하고 실연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은 괴테로선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하루에도 두 번씩 지인을 보내 그녀의 병세를 물었다. 그의 염려가 힘이 되었는지 그녀는 얼마 후 마침내 열병을 털고 일어났다. 그러한 마음을 괴테의 절친한 친구 앙겔리카 부인이 모를 리 없었다. 그녀는 괴테의 마음속 연인을 불러내 상심한 마음을 달래주려 했던 것이다. 활기 넘치는 사육제를 함께 구경한다면 이 밀라노 처녀가 본래의 쾌활한 성품을 되찾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베네치아 광장에서 극적으로 만나게 된 것이다.
다시 두 달이 흘러 괴테는 3년간의 이탈리아 체류를 끝내고 귀환을 서둘렀다. 그는 마지막으로 밀라노 처녀를 방문했고 그녀는 사랑스러운 애교로 맞이했다. 카스텔 간돌포의 저택에서 처음 만났을 때의 그녀가 거기에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연정을 품고 있었지만 그것을 끝까지 드러내지 않은 채 마음에 담았다. 작별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는데 마부가 보이지 않았다. 어느 소년의 일손을 도우러 잠시 자리를 비운 것이었다. 밀라노 처녀는 창밖으로 그를 배웅하고 있었다. 괴테는 창문을 향해 외쳤다. "사람들이 나를 당신 곁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려나 봐요. " 그리곤 이번엔 좀 더 솔직하게 또다시 외쳤다. "당신과 헤어지는 걸 내가 못내 아쉬워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에요. " 이 고백에 가까운 말에 대해 밀라노 여인은 어떻게 답했을까? 괴테는 우리에게 그 대답을 알려주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대답이 무엇인지 안다. 그 애틋함과 아쉬움을 담아 던진 밀라노 여인의 마음의 정표를.
/미술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