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률 국세청장이 19일 옷을 벗었다. 전군표 전 국세청장에게 3000만원이 넘는 그림을 선물했다는 의혹이 끝내 부담이 됐다. 준 사람과 받은 사람 모두 부인했지만,대표적 사정기관의 최고 책임자들 간에 고가의 선물이 오갔다는 의혹만으로도 세간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이런 사례는 분명 전국의 김과장 이대리에겐 먼나라 얘기다. 그렇지만 규모만 줄이면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누구나 한번쯤 상사에게 선물하는 것을 생각해 봤음직하기 때문이다. 특히 설을 앞둔 요즘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도 없지 않다.

선물이 무조건 나쁜 건 아니다. 마음을 담았을 경우엔 특히 그렇다. 어떻게 보면 필요악일 수도 있다. 물론 선물과 뇌물의 경계가 불분명하지만 말이다.


◆때론 선물이 필요하다?

인천의 자동차 부품회사에 다니는 L과장(35).그는 작년 말 승진인사에서 물을 먹었다. 승진연한도 찼다. 업무능력도 떨어지지 않았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A부장이 인사고과를 후하게 주지 않아서다.

L과장은 고심 끝에 최근 결심을 했다. 이번 설에 값비싼(?) 선물을 하기로 한 것.어떻게 하든 A부장의 환심을 사는 게 시급하다는 판단에서다. A부장이 은근히 선물을 밝히는 걸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지방출장이나 해외출장을 다녀오는 직원들은 뭔가를 '상납'해야하는 게 관행일 정도다. 이런 A부장을 사로 잡으려면 결국 선물로 '마음'을 표시할 수밖에 없다는 게 L과장의 결론이다.

L과장처럼 값비싼 선물을 할 때는 첫째도 둘째도 '비밀'이 우선이다. 잘못하다 남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면 돈은 돈대로 쓰고 기대한 효과도 얻지 못한다. 은근히 선물을 밝히는 상사일수록 그런 사실이 회자되는 걸 극도로 꺼리기 때문이다.


◆선물은 정성이다

A부장처럼 선물을 밝히는 사람이 흔한 것은 아니다. 특히 대기업에서는 선물 문화가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마음을 전하는 '작은 선물'은 아직도 남아 있다. 잘만 활용하면 인맥관리의 일등 공신이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런 선물이다.

케이블TV PD를 거쳐 미디어 제작 업체에서 일하고 있는 P상무(50).'업계 마당발'로 불리는 그는 상사나 부하의 가족을 챙기는 방식을 선호한다.

해외 출장을 다녀오면 치즈 등 현지 특산품을 주로 사온다. 인위적인 냄새가 나는 명절선물은 오히려 피한다. 상사가 바뀔 때도 가장 먼저 챙기는 게 가족들의 취향,특히 '형수'의 취향이다. 그는 "직속상사의 집들이를 갔다가 형수가 3~10달러짜리 냉장고용 자석장식과 미니어처 술잔을 수집한다는 걸 알고 2년간 출장 때마다 현지 뒷골목을 뒤지고 다닌 적이 있다"고 말했다.

부하들에게 선물할 때는 회식이 끝난 뒤 2차나 3차 후 1 대 1로 준다. '너를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아이들 이름과 나이를 기억해뒀다가 꼭 아무개 잘 있냐고 안부를 묻고 나이와 성별에 맞춰 5000원 수준의 학용품을 개별 포장해주는 게 최고"라는 게 그의 경험담이다. P상무에게 선물은 말 그대로 정성이다.


◆돈 안드는 '선물'도 부지기수다

선물하면 으레 '물건'을 떠올린다. 그렇지만 물건이 아닌 선물도 많다. 서울 구로동의 벤처기업에 다니는 K씨(29 · 여)는 지난해 소개팅만 10건가량 주선했다. 회사의 노총각 노처녀들은 모두 한두 번씩 그녀의 덕을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공률은 30%.3명이 그녀가 소개해 준 사람과 사귀고 있다. "어차피 제 친구들도 누군가를 소개받기 원하는데 기왕이면 회사 사람들과 맺어주면 회사생활하기도 편해지는 것 아니냐"는 게 그의 지론이다.

전공과 무관하게 부동산업계에서 2년간 근무하다 작년 S전자 신입사원으로 들어간 L씨(30)는 상사와 직장 동료들로부터 부동산 전문가로 대우받는다.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다가 부동산 이야기를 물어오면 성심성의껏 설명해 주는 덕분이다. 자기가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는 전문가를 연결해 준다. L씨는 "취직이 안돼 부동산을 경험했는데 사람들이 의외로 관심이 많다"며 "든든한 인맥관리의 자원이 된다"고 강조했다.


◆선물은 인맥관리의 한 수단일뿐

P상무나 K씨처럼 주변 사람을 챙기려면 세심하고 꼼꼼한 성격이 필수적이다. 성격에 맞지 않으면 마음이 있더라도 실행하기 힘들다. 아무리 성격이 그렇더라도 월급쟁이 생활을 하려면 인맥관리가 필수적이다. 어떻게 보면 선물은 인맥관리를 위한 조그만 수단일 뿐이다.

인맥관리를 위한 노하우는 개인마다 다르다. 가족 애경사까지 일일이 챙기고 부인까지 동원해 온갖 대소사를 처리해 주는 '마름형'도 있다. 그저 맡은 일을 묵묵히 처리하며 오로지 성과로서 인맥을 만들어가는 '돌쇠형'도 존재한다. 그런가 하면 온갖 지연 학연을 찾아 이리저리 얽어매는 '마당발형'이 때론 효과를 발휘하기도 한다.

중요한 건 상대가 어떤 사람이냐다. 선물을 좋아하는지,'호형호제'하기를 선호하는지,그저 충성심을 따지는지를 가려 방법을 달리해야 한다. 성과를 중시하는 상사에게 엉뚱하게 선물공세를 펼치다가는 역효과를 볼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선물과 뇌물 사이

선물과 뇌물의 구분은 모호하다. 이에 따라 최근 기업이나 정부는 선물과 뇌물을 판별하는 기준을 분명히 하는 추세다. 공직자 행동강령은 순수한 선물의 기준을 3만원 이하로 본다. 다만 소액이라도 대가성이 있는 것,예컨대 교통단속을 막아준 대가로 받은 1만원짜리 주유권은 뇌물이 된다.

기업들의 경우 대체로 3만~10만원을 용인할 수 있는 선물로 보고 있다. 삼성그룹 · 하나은행의 경우 10만원이 상한선이다. 대한상공회의소는 5만원이 한도다. 현대카드는 선물을 줄 때는 10만원까지,받을 때는 5만원까지로 한도를 달리 한다. 농협은 3만원(경조사는 5만원)이 기준이다.

이상은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