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기획] (1) 위기를 극복한 사람들/광동제약 최수부 회장‥50번 퇴짜끝에 '비타500' 내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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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기획] (1) 위기를 극복한 사람들/광동제약 최수부 회장‥50번 퇴짜끝에 '비타500' 내놔
외환위기 여파로 온 나라가 신음하던 1998년 4월28일.중국 출장에서 막 돌아온 최수부 광동제약 회장(72)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인은 자금담당 임원.수화기 저편의 목소리는 떨렸다.
"큰일 났습니다. A은행이 대출을 못 해주겠답니다. 오늘 막아야 할 어음이 32억원이나 됩니다. 어떻게 할까요?"
최 회장은 당황했다. 어음을 막지 못하면 광동제약이 부도난다는 얘기 아닌가. 조선무약과 8년 넘게 펼쳐온 '쌍화탕 전쟁'으로 회사의 재무상태가 엉망이 되긴 했지만,단 한순간도 광동제약이 문 닫으리라고 생각해보지 않았던 그였다.
쌍화탕은 1990년대 초만 해도 1병당 출고가격이 300원 수준으로 효자상품이었다. 그러나 두 회사 간 출혈경쟁이 가열되면서 그 즈음 130원까지 떨어졌다. 연매출 500억원 규모의 광동제약에는 매년 60억~70억원의 부채가 쌓여갔다. "누가 이기는지 끝까지 해보자"던 '최씨 고집'은 1997년 하반기 조선무약이 먼저 부도나면서 승리를 얻었다. 그렇지만 말 그대로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그래도 믿을 곳은 주거래 은행뿐.최 회장은 한걸음에 당시 한일은행으로 달려갔다. 은행으로 가는 차 안에서 '광동제약이 1차 부도났다'는 뉴스를 들었다. 최 회장은 우황청심원 재료인 '사향'을 담보로 한 달짜리 급전을 마련해 최종 부도를 막는 데 성공한다. 그렇지만 1차 부도가 남긴 후유증은 컸다. 원료 공급업체는 "현금을 줘야만 물건을 내주겠다"고 압박했다.
"막막했지요. 35년 신뢰가 이렇게 무너지나 싶었습니다. 거래처를 찾아다니며 '최수부가 돈 떼어 먹을 인간이냐.예전 그대로 거래하자'고 설득했습니다. 그래도 인간 최수부가 아주 헛살지는 않았는지 조금씩 좋아지더군요. "
임직원들도 회사 살리기에 동참했다. 노동조합이 앞장서 전 사원의 1998년분 상여금 전액을 반납키로 결의했다.
'30분 일찍 출근하고 30분 일 더하기','연장 수당 반납하기' 캠페인도 자발적으로 전개했다. 최 회장은 보유 중인 회사 주식 10만주를 임직원들에게 무상 기증했다. 당시 시가로 9억원 규모였다. 한방유통 우신약품 등 자회사를 없애면서도 임직원들을 광동제약과 광동생활건강에 재배치하는 등 인위적인 구조조정은 피했다.
일단 숨통은 트였지만 800억원 넘게 불어난 빚은 여전히 골칫거리였다. 유상증자가 필요했지만 당시 상황에서 '그림의 떡'이었다. 예상치 못한 돌파구는 그해 가을 찾아왔다.
"한 공중파 방송에서 '최수부 특집 방송'을 제작하겠다는 겁니다. '원가를 낮추기 위해 품질을 버리지는 않는다'는 최씨 고집에 대해 얘기했더니 '저런 사람이 경영하는 광동은 믿을 만한 회사겠구나'란 시청자들의 반응이 쏟아지더군요. "
1998년 말 실시된 유상증자는 TV를 시청한 '개미'들의 뜨거운 성원 덕분에 30 대 1의 청약경쟁률을 기록할 정도로 흥행에 성공했다.
그 즈음 최 회장의 머릿속은 '차세대 먹거리 개발'로 가득했다. 새로운 아이디어는 당시 영업본부장이었던 김현식 부사장의 머리에서 나왔다. 알약이나 과립 형태가 전부였던 비타민C를 드링크제로 만들어 보자고 제안한 것.최 회장은 무릎을 탁 쳤다.
"바로 이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몸에 좋은 비타민C를 음료수처럼 편하게 마실 수 있게 만들면 대박이 될 수 있다는 감이 왔습니다. 관건은 시고 떨떠름한 비타민C의 맛을 잡는 것이었죠."
하지만 '입안에 착 감기는 비타민C'를 만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개발팀에서 시제품을 만들어 올릴 때마다 최 회장은 "이 정도론 안 돼"라며 퇴짜를 놓았다. 그러기를 50여번.최 회장의 '까다로운 혀'를 통과한 '마시는 비타민'은 2001년 2월 '비타500'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나왔다.
비타500은 동아제약의 '박카스'가 점령하던 국내 드링크 시장의 판도를 뒤흔들며 2005년 이후 매년 1000억원이 넘는 매출을 광동제약에 안겨주는 최고 효자상품이 됐다. 2005년 선보인 '광동 옥수수 수염차' 역시 500억원이 넘는 매출을 기록하고 있다. 2000년 779억원 수준이던 광동제약 매출은 작년 2750억원으로 불어났다.
나이를 잊은 노(老)경영인은 요즘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다. 비타500 같은 대박상품을 의약품 분야에서 내놓기 위해 최근 60억원을 투입,신약 개발을 전담하는 R&D(연구개발) 조직을 신설했기 때문이다. 한방의약품 전문기업에서 음료업계의 강자로 모습을 바꾸더니,이제 서구식 화학합성 신약 개발기업으로 두 번째 변신을 준비하고 있는 셈이다.
"그냥 음료수 장사나 잘 하지,왜 성공확률이 1만분의 1에 불과한 신약 개발에 뛰어드냐는 얘기도 듣습니다. 하지만 진짜 위기는 기존 성과에 만족하는 순간 찾아옵니다. 언제까지나 비타500만 바라볼 수는 없잖습니까. 어떤 위기에서도 회사를 지켜낼 수 있도록 강력한 무기를 만들어 놓아야죠."
오상헌 기자 ohyeah@hankyung.com
"큰일 났습니다. A은행이 대출을 못 해주겠답니다. 오늘 막아야 할 어음이 32억원이나 됩니다. 어떻게 할까요?"
최 회장은 당황했다. 어음을 막지 못하면 광동제약이 부도난다는 얘기 아닌가. 조선무약과 8년 넘게 펼쳐온 '쌍화탕 전쟁'으로 회사의 재무상태가 엉망이 되긴 했지만,단 한순간도 광동제약이 문 닫으리라고 생각해보지 않았던 그였다.
쌍화탕은 1990년대 초만 해도 1병당 출고가격이 300원 수준으로 효자상품이었다. 그러나 두 회사 간 출혈경쟁이 가열되면서 그 즈음 130원까지 떨어졌다. 연매출 500억원 규모의 광동제약에는 매년 60억~70억원의 부채가 쌓여갔다. "누가 이기는지 끝까지 해보자"던 '최씨 고집'은 1997년 하반기 조선무약이 먼저 부도나면서 승리를 얻었다. 그렇지만 말 그대로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그래도 믿을 곳은 주거래 은행뿐.최 회장은 한걸음에 당시 한일은행으로 달려갔다. 은행으로 가는 차 안에서 '광동제약이 1차 부도났다'는 뉴스를 들었다. 최 회장은 우황청심원 재료인 '사향'을 담보로 한 달짜리 급전을 마련해 최종 부도를 막는 데 성공한다. 그렇지만 1차 부도가 남긴 후유증은 컸다. 원료 공급업체는 "현금을 줘야만 물건을 내주겠다"고 압박했다.
"막막했지요. 35년 신뢰가 이렇게 무너지나 싶었습니다. 거래처를 찾아다니며 '최수부가 돈 떼어 먹을 인간이냐.예전 그대로 거래하자'고 설득했습니다. 그래도 인간 최수부가 아주 헛살지는 않았는지 조금씩 좋아지더군요. "
임직원들도 회사 살리기에 동참했다. 노동조합이 앞장서 전 사원의 1998년분 상여금 전액을 반납키로 결의했다.
'30분 일찍 출근하고 30분 일 더하기','연장 수당 반납하기' 캠페인도 자발적으로 전개했다. 최 회장은 보유 중인 회사 주식 10만주를 임직원들에게 무상 기증했다. 당시 시가로 9억원 규모였다. 한방유통 우신약품 등 자회사를 없애면서도 임직원들을 광동제약과 광동생활건강에 재배치하는 등 인위적인 구조조정은 피했다.
일단 숨통은 트였지만 800억원 넘게 불어난 빚은 여전히 골칫거리였다. 유상증자가 필요했지만 당시 상황에서 '그림의 떡'이었다. 예상치 못한 돌파구는 그해 가을 찾아왔다.
"한 공중파 방송에서 '최수부 특집 방송'을 제작하겠다는 겁니다. '원가를 낮추기 위해 품질을 버리지는 않는다'는 최씨 고집에 대해 얘기했더니 '저런 사람이 경영하는 광동은 믿을 만한 회사겠구나'란 시청자들의 반응이 쏟아지더군요. "
1998년 말 실시된 유상증자는 TV를 시청한 '개미'들의 뜨거운 성원 덕분에 30 대 1의 청약경쟁률을 기록할 정도로 흥행에 성공했다.
그 즈음 최 회장의 머릿속은 '차세대 먹거리 개발'로 가득했다. 새로운 아이디어는 당시 영업본부장이었던 김현식 부사장의 머리에서 나왔다. 알약이나 과립 형태가 전부였던 비타민C를 드링크제로 만들어 보자고 제안한 것.최 회장은 무릎을 탁 쳤다.
"바로 이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몸에 좋은 비타민C를 음료수처럼 편하게 마실 수 있게 만들면 대박이 될 수 있다는 감이 왔습니다. 관건은 시고 떨떠름한 비타민C의 맛을 잡는 것이었죠."
하지만 '입안에 착 감기는 비타민C'를 만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개발팀에서 시제품을 만들어 올릴 때마다 최 회장은 "이 정도론 안 돼"라며 퇴짜를 놓았다. 그러기를 50여번.최 회장의 '까다로운 혀'를 통과한 '마시는 비타민'은 2001년 2월 '비타500'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나왔다.
비타500은 동아제약의 '박카스'가 점령하던 국내 드링크 시장의 판도를 뒤흔들며 2005년 이후 매년 1000억원이 넘는 매출을 광동제약에 안겨주는 최고 효자상품이 됐다. 2005년 선보인 '광동 옥수수 수염차' 역시 500억원이 넘는 매출을 기록하고 있다. 2000년 779억원 수준이던 광동제약 매출은 작년 2750억원으로 불어났다.
나이를 잊은 노(老)경영인은 요즘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다. 비타500 같은 대박상품을 의약품 분야에서 내놓기 위해 최근 60억원을 투입,신약 개발을 전담하는 R&D(연구개발) 조직을 신설했기 때문이다. 한방의약품 전문기업에서 음료업계의 강자로 모습을 바꾸더니,이제 서구식 화학합성 신약 개발기업으로 두 번째 변신을 준비하고 있는 셈이다.
"그냥 음료수 장사나 잘 하지,왜 성공확률이 1만분의 1에 불과한 신약 개발에 뛰어드냐는 얘기도 듣습니다. 하지만 진짜 위기는 기존 성과에 만족하는 순간 찾아옵니다. 언제까지나 비타500만 바라볼 수는 없잖습니까. 어떤 위기에서도 회사를 지켜낼 수 있도록 강력한 무기를 만들어 놓아야죠."
오상헌 기자 oh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