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권기관인 한국은행이 앞으로 시장에 직접 뛰어들어 기업어음(CP), 회사채 등을 직접 매입할 수도 있음을 시사해 관심이 쏠리고 있다. 한은이 유동성 강화를 위해 직접 시장 주체 중 하나로 나설 경우 시장에 엄청난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가 11일 금융통화위원회 정례회의 직후 가진 기자 브리핑에서 "지금이 통화신용의 수축기이기 때문에 통상적인 것에서 벗어나서 일종의 비상사태에 취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는데 우리(금융통화위원회)도 경계선에 와 있다고 생각한다"며 "금통위가 통화신용의 수축기라고 판단하면 발권력을 동원해 시장에 직접 개입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한은 금통위가 현 상황을 심각한 통화신용 수축기라고 판단한다면 지금까지 내놓은 통안증권 중도 환매, 환매조건부 증권매매(RP) 방식을 통한 유동성 공급 등 전통적인 통화정책 수단에 머무르지 않고 다른 회사채나 CP 등을 직접 사들이는 카드를 사용할 수 있음을 내비친 것으로 금융권은 분석하고 있다.

시장에서는 최근 한은이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처럼 직접 시장 주체로 참여해 유동성을 대폭 확대해달라고 요구해왔다.

한은은 그동안 한국은행법 79조를 들어 이런 요구에 응답하지 않았다. 제79조(민간과의 거래제한)는 '한국은행은 정부·정부대행기관 또는 금융기관 외의 법인이나 개인과 예금 또는 대출의 거래를 하거나 정부·정부대행기관 또는 금융기관 외의 법인이나 개인의 채무를 표시하는 증권을 매입할 수 없다'라고 규정돼 있다.

그러나 한은 금통위가 '심각한 통화신용의 수축기'라고 판단할 경우 79조 제약이 풀어지며 CP, 회사채 등을 직접 사들일 수 있다.

한국은행법 제80조(영리기업에 대한 여신)을 보면 '금융기관이 기존 대출금을 회수하며 신규 대출을 억제하고 있는 심각한 통화신용의 수축기에 있어서 한국은행은 제79조의 규정에 불구하고 (금융통화위원회) 위원 4인 이상의 찬성으로 금융기관이 아닌 자로서 금융업을 영위하는 자 등 영리기업에 대하여 여신할 수 있다'라고 규정돼 있다.

금융권은 한은이 최근 은행채와 일부 특수채, 주택금융공사 채권 등을 신규로 RP거래 대상에 포함한 시킨 것에 주목하고 있다. 금통위에서 관련 규정을 개정, 회사채나 CP를 RP 거래 대상에 추가로 넣거나, 아니면 더 나아가 유통시장에서 직접 매입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신용위험이 있는 채권 쪽에 자금이 흘러들어가 금리를 빠르게 낮출 수 있고 기업들의 자금난도 신속하게 덜어줄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아직은 비상사태 때 쓸 수 있는 (카드를 쓸) 단계까지는 안 왔다"고 한발 물러선 이 총재는 중앙은행의 발권력을 동원해 비상수단을 쓰는 것은 나중에 인플레이션 등의 더 큰 후유증을 남길 수 있다는 점에서 조심스러워 했다.

하지만 이 총재는 "정부가 재정으로 정책을 하려면 세금을 거두거나 국채를 조달해 예산에 포함시켜 국회 의결을 받아야 하지만 중앙은행의 발권력 동원은 그런 번거로운 절차가 없고 따로 재원을 마련해야 하는 부담도 없다"고 밝혀 향후 한은의 결정에 촉각이 쏠리고 있다.

한경닷컴 박세환 기자 gre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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