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절한 리스크 제동장치가 없는 IB투자는 시한폭탄과 다를 게 없습니다. "(김광준 크레디트스위스증권 상무)

'100년 만의 위기'라는 지금 한국 투자은행(IB)에도 리스크 관리는 지상 과제다. 글로벌 IB들의 몰락은 리스크를 간과한 무리한 투자가 자초한 결과로,피할 수 있었던 예견된 불행이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특히 거액의 성과급 욕심에 무리한 '베팅' 유혹을 받기 마련인 영업맨들의 탐욕을 통제하지 못하면 아무리 탄탄한 회사라도 하루아침에 무너진다는 점이 확인됐다. 이 때문에 김성태 대우증권 사장은 "이번 글로벌 금융위기의 본질은 리스크 관리의 위기"라고 단언했다.

◆생사 가른 최고경영자(CEO)의 리스크마인드

이번 금융위기로 세계적인 업체들과 금융맨들이 쓰러졌지만 '난세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대로 '깜짝스타'도 탄생했다.

골드만삭스의 모기지채권 트레이더였던 조시 번바움과 마이클 스웬손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각각 1000만달러의 특별성과급을 받으며 돈방석에 앉아 월가의 유명인사가 됐다. 작년 초부터 모기지채권의 위험성을 감지하고 관련 선물을 대량 매도해 회사에 막대한 이익을 안겨다준 대가다. 골드만삭스는 이들의 활약으로 지난해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의 직격탄을 피해 116억달러의 사상 최대 이익을 내는 성과를 올렸다. 이 같은 스타 탄생 이면에는 CEO의 리스크 마인드도 큰 역할을 했다. 골드만삭스의 CEO인 로이드 블랭크페인 회장은 작년 초부터 현장 트레이더들이 제기하던 '경보'를 귀담아 들어왔다. 그는 심상치 않다는 신호가 잇따르자 그해 5월부터 모기지 채권을 대거 매각해 서브프라임의 폭격을 피할 수 있었다.

베이스턴스 등을 인수하며 '월가의 구원자'로 등장한 JP모건의 성공도 제이미 다이먼 회장의 위기관리 공이 크다. JP모건은 2006년 10월부터 서브프라임 관련 유동화 상품 비중을 줄여 3위였던 채권시장 점유율 순위가 6위까지 미끄러져 내부의 반발도 많았지만,다이먼 회장은 결단을 밀고 나가 결정적인 위기를 모면했다. 블랭크페인과 다이먼의 이 같은 대처는 파국을 맞은 다른 IB업체들의 CEO 행보와 극명하게 대비된다.

뱅크 오브 아메리카에 합병된 메릴린치에서도 골드만삭스처럼 일찍부터 영업일선에서 올라오는 경고의 목소리가 높았다. 하지만 2006년부터 위험을 경고했던 이 회사의 모기지 책임자인 제프 크론솔과 리스크담당 최고책임자(CRO)는 오히려 연쇄 사표를 냈다. 모기지를 활용한 자산담보부증권(CDO) 시장에서 1위로 부상하는 등 회사가 잘 나가고 있는 상황에서 난데없는 경고를 내고 있다며 당시 스탠 오닐 회장이 묵살했던 데 따른 것이다. 이에 대해 한 외국계 증권사 한국지점 사장은 "옛 골드만삭스의 모기지 트레이더들이 메릴린치로 자리를 옮긴 뒤 빨리 '한 건'을 올려야 한다는 조급함과 성과급 욕심에 모기지 채권에 무리하게 베팅했던 것을 메릴린치의 허술한 위기관리 시스템이 통제하지 못해 결정타를 맞은 것"이라고 진단했다.

김동원 금융감독원 부원장보는 "금융회사들은 통상 신용위험엔 민감하지만 시장위험이나 유동성위험을 간파하는 데는 취약하다"며 "결국 위기상황에서는 CEO의 마인드와 결단이 생사를 가른다"고 지적했다.

◆금융투자지주사 유력한 대안될 것


이번 금융위기가 CDO라는 낯선 파생상품이 원인인 것처럼 20여년 전에도 당시엔 신종상품이던 '정크본드'로 인해 금융시장은 위기를 맞았었다.

마이클 밀켄은 1980년대 고수익 정크본드 시장을 개척해 드렉셀증권을 단숨에 선두권 IB로 성장시켰다. 마침 레이건 행정부의 금융규제 완화로 인수합병(M&A) 시장이 태동하자 밀켄은 '큰손'들을 끌어들이며 정크본드 시장을 순식간에 2000억달러 규모로 키우며 '정크본드의 황제'로 떠올랐다. 하지만 밀켄의 질주는 1987년 10월 블랙먼데이의 주가 대폭락으로 끝났다. 밀켄은 사기 혐의로 수감됐고 드렉셀은 6억5000만달러의 벌금을 물고 파산했다.

과도한 리스크 부담이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아는 금융회사들이 어째서 반복되는 금융위기에 허망하게 당하는 것일까. 전문가들은 금융감독 체제가 쫓아가지 못할 만큼 신상품이 빠르게 진화하고 있어 위기의 실체 파악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점을 이유로 제시한다. 이로 인해 금융시장 발전과 글로벌화로 한 곳에서 발생한 위기가 전세계로 퍼져나가고 피해 규모도 점차 커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다행히 한국 증권사들은 서브프라임 관련 피해가 적었다. 하지만 위기대응 수준을 보면 아직 초보단계다. 대형사 두서너 곳을 제외하면 제대로 된 위기관리 시스템을 갖춘 회사가 없다.

이에 대해 앞으로 허용될 금융투자지주회사 체제가 리스크를 시스템관리로 통제할 수 있는 유력한 대안이 될 것이란 관측이다. 이 체제가 도입되면 증권사 또는 보험사가 지주회사가 돼 은행을 제외한 저축은행등 금융업체를 계열사로 둘 수 있어 지주사가 전체 리스크를 관리할 수 있게 된다.

임병철 신한FBS연구소장은 "금융투자지주회사 체제가 되면 증권사가 자신의 취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만큼 IB비즈니스 리스크관리에 효율적인 방안이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유상호 한국투자증권 사장도 "증권사 중심의 금융투자지주회사 모델이 위험관리를 위한 진일보한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백광엽 기자 kecor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