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하루짜리 급전 빌려라" 발동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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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연말에 갚으면 내년 1월1일 신규대출" 압박
은행들 BIS 비율 충족 불똥 기업에 번져
대기업도 사채시장 기웃·어음 쪼개기까지
중견·중소기업을 몰아쳤던 자금난이 대기업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매출채권 해소와 상여금 지급 등 자금수요가 많은 연말을 앞두고 있음에도 은행들이 기업 여신 회수를 더욱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중은행들은 연말까지 만기가 돌아오는 차입금의 전액 상환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아 다소 여유가 있던 대기업들까지 자금줄이 말라가고 있다. 기존 대출금의 만기를 연장해주더라도 연장 기간이 1∼3개월 정도에 불과,기업들은 현금흐름 개선 없이 채무구조만 초단기로 바뀌는 양상이 되풀이되고 있다. 이대로 가다간 자금시장의 현 난맥상이 내년 초에 그대로 재연될 것으로 보인다.
◆"한번에 다 갚으라니…"
운영자금을 돌리기 위해 시중은행으로부터 연간 1000억원의 일반대출 자금을 쓰고 있는 20대 그룹의 한 제조업체.이 회사의 자금담당 임원 P씨는 얼마 전 거래은행으로부터 12월31일에 맞춰 대출자금 전액을 갚아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연말까지 국제결제은행(BIS)기준 자기자본비율을 조금이라도 끌어올리기 위한 것이고,내년 1월1일에 다시 신규대출을 일으켜주겠으니 하루만 협조해달라는 정중한 설명과 함께였다.
하지만 P씨는 "자금시장이 얼어붙어 그만한 돈을 구할 수 없다"며 "가뜩이나 돈 쓸 곳이 많은 연말에 운영자금까지 일시에 갚으라고 하면 어떡하란 말이냐"고 볼멘소리를 했다. 말은 그렇게 해도 P씨는 하루짜리 급전을 구하기 위해 사채시장 등을 뛰어다니고 있다.
기업들이 운영자금으로 사용하는 은행대출 계정은 일반대출과 당좌대출 등 두 가지다. 통상 만기 1년짜리로 약정하는 이들 계정은 기업들이 현금흐름에 따라 탄력적으로 활용하는 '마이너스 통장'과 비슷한 것이다.
한 은행 관계자는 "기업들의 사정이 딱하다는 걸 알지만 우리도 어쩔 수 없다"며 "내년 초에 다시 똑같은 금액의 대출한도를 열어주겠다고 해도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대기업 진성어음도 돌아다녀
기업 자금난이 확대되면서 10년 전 외환위기 이후 거의 자취를 감췄던 대기업들의 만기 1∼3개월짜리 융통어음(신용으로 발행하는 어음)까지 등장하고 있다. 그것도 100억원 미만짜리로 잘게 쪼개 여러 군데서 할인을 받는 방식이다. 매출채권처럼 물품거래를 동반하는 대기업들의 진성어음도 사채시장에 본격적으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기업들의 차입구조도 초단기로 바뀌고 있다. 은행들이 기존 차입금을 3개월 미만으로 한정해 만기를 연장해주고 있어서다. 그것도 일부 차입금은 상환받는 조건이 붙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상당한 규모의 차입금 상환 일정이 또다시 내년 초로 몰리는 악순환이 빤히 내다보이는 형편이다. 한 의류업체 관계자는 "원래 만기가 서로 달랐던 차입금 상환일정이 내년 1월에서 3월까지 집중적으로 몰려버렸다"며 "연말만 넘기면 괜찮아질 것이라는 기대는 일찌감치 접었다"고 하소연했다.
◆무역금융은 '그림의 떡'
10대 그룹 계열사인 L사는 요즘 은행을 상대하는 '전략'을 바꿨다. 자금담당 O씨는 "돈 갚으라는 독촉을 받고 난 뒤 사정을 봐달라고 하면 돈줄을 더 조이는 게 은행"이라며 "얼마 전에 '부도를 내든 마음대로 하시라'고 했더니 오히려 덜하더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일부 기업들은 보유 자산을 절반값에 매각하는 등 현금 확보를 위해 안간힘을 다해도 별 효과가 없자 정책당국과 은행을 향해 노골적으로 비난을 퍼붓고 있다. 또 다른 10대 그룹 계열사의 관계자도 "자산을 팔아도 은행들 모르게 해야 한다"며 "매각 즉시 회수해가기 때문에 조금의 여유도 가질 수 없는 형편"이라고 푸념했다.
정부가 다음 주부터 본격화할 무역금융 자금 지원도 당장은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란 게 업계 주장이다. 160억달러의 무역자금 중 100억달러가 중소기업에 우선적으로 배정되는 데다 지원 조건도 까다롭다는 것이다. 특히 일부 대기업들의 원자재 조달을 위한 수입 유전스 매각은 해외 거래국 측의 금융시스템이 여전히 불안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조일훈/김동민 기자 jih@hankyung.com
은행들 BIS 비율 충족 불똥 기업에 번져
대기업도 사채시장 기웃·어음 쪼개기까지
중견·중소기업을 몰아쳤던 자금난이 대기업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매출채권 해소와 상여금 지급 등 자금수요가 많은 연말을 앞두고 있음에도 은행들이 기업 여신 회수를 더욱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중은행들은 연말까지 만기가 돌아오는 차입금의 전액 상환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아 다소 여유가 있던 대기업들까지 자금줄이 말라가고 있다. 기존 대출금의 만기를 연장해주더라도 연장 기간이 1∼3개월 정도에 불과,기업들은 현금흐름 개선 없이 채무구조만 초단기로 바뀌는 양상이 되풀이되고 있다. 이대로 가다간 자금시장의 현 난맥상이 내년 초에 그대로 재연될 것으로 보인다.
◆"한번에 다 갚으라니…"
운영자금을 돌리기 위해 시중은행으로부터 연간 1000억원의 일반대출 자금을 쓰고 있는 20대 그룹의 한 제조업체.이 회사의 자금담당 임원 P씨는 얼마 전 거래은행으로부터 12월31일에 맞춰 대출자금 전액을 갚아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연말까지 국제결제은행(BIS)기준 자기자본비율을 조금이라도 끌어올리기 위한 것이고,내년 1월1일에 다시 신규대출을 일으켜주겠으니 하루만 협조해달라는 정중한 설명과 함께였다.
하지만 P씨는 "자금시장이 얼어붙어 그만한 돈을 구할 수 없다"며 "가뜩이나 돈 쓸 곳이 많은 연말에 운영자금까지 일시에 갚으라고 하면 어떡하란 말이냐"고 볼멘소리를 했다. 말은 그렇게 해도 P씨는 하루짜리 급전을 구하기 위해 사채시장 등을 뛰어다니고 있다.
기업들이 운영자금으로 사용하는 은행대출 계정은 일반대출과 당좌대출 등 두 가지다. 통상 만기 1년짜리로 약정하는 이들 계정은 기업들이 현금흐름에 따라 탄력적으로 활용하는 '마이너스 통장'과 비슷한 것이다.
한 은행 관계자는 "기업들의 사정이 딱하다는 걸 알지만 우리도 어쩔 수 없다"며 "내년 초에 다시 똑같은 금액의 대출한도를 열어주겠다고 해도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대기업 진성어음도 돌아다녀
기업 자금난이 확대되면서 10년 전 외환위기 이후 거의 자취를 감췄던 대기업들의 만기 1∼3개월짜리 융통어음(신용으로 발행하는 어음)까지 등장하고 있다. 그것도 100억원 미만짜리로 잘게 쪼개 여러 군데서 할인을 받는 방식이다. 매출채권처럼 물품거래를 동반하는 대기업들의 진성어음도 사채시장에 본격적으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기업들의 차입구조도 초단기로 바뀌고 있다. 은행들이 기존 차입금을 3개월 미만으로 한정해 만기를 연장해주고 있어서다. 그것도 일부 차입금은 상환받는 조건이 붙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상당한 규모의 차입금 상환 일정이 또다시 내년 초로 몰리는 악순환이 빤히 내다보이는 형편이다. 한 의류업체 관계자는 "원래 만기가 서로 달랐던 차입금 상환일정이 내년 1월에서 3월까지 집중적으로 몰려버렸다"며 "연말만 넘기면 괜찮아질 것이라는 기대는 일찌감치 접었다"고 하소연했다.
◆무역금융은 '그림의 떡'
10대 그룹 계열사인 L사는 요즘 은행을 상대하는 '전략'을 바꿨다. 자금담당 O씨는 "돈 갚으라는 독촉을 받고 난 뒤 사정을 봐달라고 하면 돈줄을 더 조이는 게 은행"이라며 "얼마 전에 '부도를 내든 마음대로 하시라'고 했더니 오히려 덜하더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일부 기업들은 보유 자산을 절반값에 매각하는 등 현금 확보를 위해 안간힘을 다해도 별 효과가 없자 정책당국과 은행을 향해 노골적으로 비난을 퍼붓고 있다. 또 다른 10대 그룹 계열사의 관계자도 "자산을 팔아도 은행들 모르게 해야 한다"며 "매각 즉시 회수해가기 때문에 조금의 여유도 가질 수 없는 형편"이라고 푸념했다.
정부가 다음 주부터 본격화할 무역금융 자금 지원도 당장은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란 게 업계 주장이다. 160억달러의 무역자금 중 100억달러가 중소기업에 우선적으로 배정되는 데다 지원 조건도 까다롭다는 것이다. 특히 일부 대기업들의 원자재 조달을 위한 수입 유전스 매각은 해외 거래국 측의 금융시스템이 여전히 불안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조일훈/김동민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