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초 세계 반도체 장비업계에선 한가지 주목할 만한 사건이 벌어졌다. 한국의 후발 반도체 장비업체가 올해 전 세계 시장에서 진행된 4건의 8세대 LCD패널 디스펜서(액정 적하장치) 공급 계약 중 3건을 따냈기 때문이다. 이 업체가 '축배'를 드는 사이 경쟁업체인 일본의 H사 안팎에선 '반도체장비 사업부 폐지' 얘기가 나돌았다. '제자'격이던 한국 업체에 주도권을 뺏겼다는 책임론이 불거진 것.일본업체가 20여년 이상 장악해 온 디스펜서 '텃밭'에서 파란을 일으킨 주인공은 토종 벤처기업 탑엔지니어링이다. 이 회사 김원남 대표는 "가격조건과 장비 성능,시기 등이 잘 맞아떨어진 덕분"이라며 "운도 좋았다"고 겸손해했다.

하지만 업계에선 이 회사가 비교적 짧은 시간에 세계적인 업체로 도약할 수 있었던 비결로 '실력'을 꼽는 이들이 많다. 창립 초기인 1996년부터 부설연구소를 설립한 이래 연구인력을 전체 직원의 절반에 육박하는 80여명으로 확대하는 한편 한 해 매출액(2007년 454억원)의 12%인 54억원을 기술개발비로 투입하는 등 '실력쌓기'에 주력한 결과라는 얘기다.

실제 탑엔지니어링은 1993년 창립 직후 반도체 후공정장비인 '플립칩 본더'를 국산화한 데 이어,1995년부터 곧바로 LCD장비 개발에 착수해 세계 최초로 5세대 LCD CELL 자동화 장비 개발에 성공했다. 2003년에는 LCD공정 핵심장비인 디스펜서를 국산화하는 데 성공,LCD 디스펜서 시장의 글로벌리더로 발돋움할 발판을 마련했다.

디스펜서는 액정적하시스템(ODF) 장비로 셀 공정 과정에서 유리기판 위에 액정방울을 정량 떨어뜨려 균일한 액정층을 형성하는 LCD 공정 핵심 장비다. 탑엔지니어링은 5세대에서 8세대로 진화하는 LCD 제조라인 기술을 선점하기 위해 액정분사 시간,이물질 투입 여부,공정속도 등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이뿐만 아니라 2005년부터는 해외영업에도 적극 나섰다. 주력 매출처였던 LG디스플레이(전 LG필립스LCD)만으로는 성장에 한계가 있다는 판단에서다. 브랜드에선 세계적인 업체에 밀렸지만 기술력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AU옵트로닉스(AUO), 치메이옵토일렉트로닉스(CMO),한스타(Hannstar) 등 중화권 LCD 패널업체들이 속속 고객으로 합류했다. 2007년에는 기존 장비보다 적은 양의 액정 토출(떨어뜨리기)이 가능한 개량형 디스펜서(SPD Type Dispenser)를 개발,해외 장비 공급에 더 큰 탄력을 받게 됐다. 이 같은 노력은 곧 실적으로 나타났다.

탑엔지니어링은 올해 상반기에만 지난해 매출에 근접하는 431억원의 매출을 달성했다. 특히 3분기에는 분기 기준 최대 매출인 375억원을 달성했다.

김원남 대표는 "11월 현재 기준으로 수주잔고가 약 540억원에 달해 올해 전체 매출은 1000억원을 넘어설 것"이라며 "앞으로도 기술개발에 주력해 반도체 장비 시장을 이끌어가는 확실한 글로벌 리더가 되겠다"고 말했다.

이관우 기자 leebro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