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길진 칼럼] 돌아온 개태사의 주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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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필자에게 일어난 신기한 사건을 하나 소개하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한국경제신문과 인연의 뿌리를 확인하는 일화지만, 독자 여러분들은 ‘전설 따라 삼천리’같은 옛날이야기를 듣는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잠시 머리를 식히길 바란다.
얼마 전 한 부인이 선친의 유언이라며 내게 꼭 전해줄 물건이 있다며 전화한 통을 걸었다. 유족들에게 유언까지 남길 정도면 분명 혈족이나 측근쯤 돼야 상식적이다. 하지만 고인의 존함 ‘이규행’ 을 듣는 순간 수많은 의문이 한꺼번에 고개를 쳐들었다. 만만치 않은 숙제란 예감과 함께 말이다.
내가 그분을 처음 만난 건 1981년 장안동 시절로 기억한다. 내 나이 35이고, 그 분은 ‘이국장’으로 불리며 일간 신문의 편집국장으로 재직할 때다. 79년에 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으로 온 나라가 뒤숭숭할 시기였다. 이국장은 한 모임에서 내게 물었다.
“어떻게 박대통령서거를 미리 아셨어요? 보아하니 나이도 젊으신 것 같은데....”
“다 아는 수가 있죠. 극상이면 자멸하잖아요.”
나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그런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이국장에게 문득 “신문사 사장을 두 번 하실 것 같고, 오래 하실 것 같습니다.”하고 말하자 이국장은 “에이, 제가 그럴 일이 있나요.”하면서 덕담 정도로 생각하고 웃어 버렸다.
“돈 많은 사람과 인연이 있지만 돈과는 인연이 없으시네요.”란 내말은 귀담아 듣지 않는 눈치였다. 그런데 그 분도 내게 알쏭달쏭한 말을 남겼다.
“차처사는 젊은 사람으로서 도의 모양새를 크게 갖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불교도 아니요, 도교도 아니요, 내가 도무지 정의 할 수가 없군요. 아무튼 나중에 나와 큰 인연이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분과의 만남은 그것이 전부였다. 그분의 행적은 후문으로 간간이 전해 듣긴 했나 두 번 다시 대면은 없었다.
얼마 후 그 분은 한국경제신문 사장이 되었고 11년 동안 최장수 신문사 사장을 역임한 후 문화일보 사장이 되었다. 이후 주요 언론사 간부를 엮임하며 국내 최초의 무가지 ‘메트로’를 창간했다. 언론의 개척자로서 뿐만 아니라 미래학자 엘빈 토플러를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하고 단전호흡과 다도에도 조예가 깊었다. 민족정기를 바로세우는 현묘학회와 한배달 단체를 이끌며 노년을 무색하게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여러모로 나와 한번쯤은 사회에서 스칠 법 법했지만 의도적이다 싶을 정도로 재회의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올해 9월 10일 이회장이 타개하고 말았다. 갑작스런 죽음이라 미쳐 가족에게 제대로 된 유언을 남기지도 못했다. 그래서 평소 고인과 깊은 이야기를 나누던 P씨가 유언을 대신 전하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고인은 생전에 P씨가 나와 친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차법사에게 이 물건을 전해 주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P씨는 “귀중한 물건 같은데 이회장님이 직접 전해주시지 그러세요?”하고 거절을 했는데 차일피일 시간이 흘렀다가 급작스런 부고를 받게 되었다. 가족들은 부랴부랴 장례를 치르고서야 미국 출장을 다녀온 P씨에게 이 사실을 전해 듣고 나에게 연락을 취했던 것이다.
고인이 당부한 물건은 다름 아닌 주장자였다. 주장자는 선사(禪師)들이 좌선할 때에나 설법할 때에 가지고 있는 지팡이다. 가슴까지 오는 장정 팔뚝 굵기의 곧게 뻗은 주장자였다. 검은 옻칠이 된 한 주장자는 어찌 보면 도깨비 방망이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집 한 채를 거뜬히 떠 바칠 수 있는 묵직한 기둥 같았다. 누가 봐도 범상치 않은 주장자의 유래를 전해 듣고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계룡산 자락에 자리 잡은 ‘개태사’ 마당에서 나온 주장자라는 것이었다.
고인이 생전에 남긴 개태사 주장자의 유래는 이랬다. 고려를 창건한 태조 왕건은 지금의 논산에 개태사를 창건했다. 개태사 자리는 나당연합군과 계백이 최후의 결전을 벌였던 황산벌과도 인접하였고, 왕건이 후백제의 신검과 최후의 일전을 벌였던 일리천(一利川) 전투의 주요한 전장이었다. 한편으로 후삼국 통일 직후 후백제의 견훤이 황산(黃山,지금의 연산)의 작은 절에서 병으로 죽었는데, 이 절이 개태사자리라는 설도 있다.
태조가 후백제를 평정하고 이를 기념하고 최후의 전승지 자리에 개태사를 세운 데는 백제인들의 민심을 달래기 위한 명분을 넘어 큰 뜻이 숨어 있었다. 바로 태조를 도와 나라를 세운 도선국사의 충고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 반신반인(半神半人)인 도선국사는 875년 '지금부터 2년 뒤에 반드시 고귀한 사람이 태어날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예언대로 송악에서 왕건이 태어났다고 한다.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도선국사는 왕건의 정신적 지주였음은 틀림없다.
고구려를 계승하고 새로운 통일된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도선국사는 태조에게 계룡산자락에 개태사(開泰寺)를 세우라고 했다. 대규모로 창건된 개태사는 태조의 초상화를 봉안한 진전(眞殿)이 세우는 일을 시발로 왕실의 조상숭배를 통해 고려 왕실을 보호하는 특별한 기능을 담당했다. 고려 500년 왕조는 개태사에서 나고 마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조선에 들어서 숭유억불정책으로 개태사는 쇄락을 거듭하다 폐사하기에 이르렀고 절터만 남게 되었다. 그러다 1930년에 그 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다른 이름으로 사찰이 중창되었다. 그런데 근래 들어 본래 절터를 재건하는 대대적인 발굴이 있었는데 이 과정에 이규행회장이 깊이 관여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개태사 터에는 지금도 대형 가마솥(철확), 석탑, 석상 등 보물이 많은데, 절을 지키던 한 보살의 꿈에 도선국사가 현몽했다고 한다. 하도 생생하고 이상한 꿈이었는데, 그날 옛 절의 마당에서 긴 나무를 하나 파냈다. 그것이 바로 그 주장자였다. 사람들은 그 주장자가 틀림없이 개태사 창건당시 함께 묻은 도선국사의 주장자라고 했고, 이회장 또한 그렇게 굳게 믿었다. 도선국사의 선맥이 대대로 전한다는 뜻으로 개태사에 도선국사의 주장자를 묻었다는 것이다.
1천년이 넘어 다시 세상에 나온 주장자는 잘 썩지 않는 재질에 옻칠을 해서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이회장은 그 주장자에 다시 정성들여 옻칠을 입혀 그동안 둘도 없이 소중한 보물로 애지중지 보관해왔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선학의 큰 족적을 남기고 불현듯 세상을 떠난 것이다.
고인이 떠나고 꼭 한 달이 지난 10월 10일, 고인의 따님이 대학로 내 선방으로 나를 찾아왔다. 교회 집사이기도한 그녀는 내게 직접 그 주장자를 전해주었다. 주장자를 전달받은 자리에서 나는 만감이 교차했다.
‘당신은 왜 자기를 따르던 그 많은 후학들을 뿌리치고 당신 최고의 보물을 내게 줄 생각을 했을까? 내가 이것으로 무엇을 하란 말인가?’
큰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커다란 숙제 떠 앉은 것이다.
이날 선방에 모인 분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사자가 사는 굴속에는 다른 짐승은 살 수 없습니다. 원효대사가 말년에 소성거사로 환속하여 소박하게 삶을 마감하고, 선풍을 휘날리던 경허대선사가 말년에 오지로 들어가 환속하여 서당 훈장으로 이름 없이 세상을 떠난 의미를 생각해봅니다. 하나가 전체이고, 전체가 하나입니다.”(hooam.com)
얼마 전 한 부인이 선친의 유언이라며 내게 꼭 전해줄 물건이 있다며 전화한 통을 걸었다. 유족들에게 유언까지 남길 정도면 분명 혈족이나 측근쯤 돼야 상식적이다. 하지만 고인의 존함 ‘이규행’ 을 듣는 순간 수많은 의문이 한꺼번에 고개를 쳐들었다. 만만치 않은 숙제란 예감과 함께 말이다.
내가 그분을 처음 만난 건 1981년 장안동 시절로 기억한다. 내 나이 35이고, 그 분은 ‘이국장’으로 불리며 일간 신문의 편집국장으로 재직할 때다. 79년에 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으로 온 나라가 뒤숭숭할 시기였다. 이국장은 한 모임에서 내게 물었다.
“어떻게 박대통령서거를 미리 아셨어요? 보아하니 나이도 젊으신 것 같은데....”
“다 아는 수가 있죠. 극상이면 자멸하잖아요.”
나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그런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이국장에게 문득 “신문사 사장을 두 번 하실 것 같고, 오래 하실 것 같습니다.”하고 말하자 이국장은 “에이, 제가 그럴 일이 있나요.”하면서 덕담 정도로 생각하고 웃어 버렸다.
“돈 많은 사람과 인연이 있지만 돈과는 인연이 없으시네요.”란 내말은 귀담아 듣지 않는 눈치였다. 그런데 그 분도 내게 알쏭달쏭한 말을 남겼다.
“차처사는 젊은 사람으로서 도의 모양새를 크게 갖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불교도 아니요, 도교도 아니요, 내가 도무지 정의 할 수가 없군요. 아무튼 나중에 나와 큰 인연이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분과의 만남은 그것이 전부였다. 그분의 행적은 후문으로 간간이 전해 듣긴 했나 두 번 다시 대면은 없었다.
얼마 후 그 분은 한국경제신문 사장이 되었고 11년 동안 최장수 신문사 사장을 역임한 후 문화일보 사장이 되었다. 이후 주요 언론사 간부를 엮임하며 국내 최초의 무가지 ‘메트로’를 창간했다. 언론의 개척자로서 뿐만 아니라 미래학자 엘빈 토플러를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하고 단전호흡과 다도에도 조예가 깊었다. 민족정기를 바로세우는 현묘학회와 한배달 단체를 이끌며 노년을 무색하게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여러모로 나와 한번쯤은 사회에서 스칠 법 법했지만 의도적이다 싶을 정도로 재회의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올해 9월 10일 이회장이 타개하고 말았다. 갑작스런 죽음이라 미쳐 가족에게 제대로 된 유언을 남기지도 못했다. 그래서 평소 고인과 깊은 이야기를 나누던 P씨가 유언을 대신 전하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고인은 생전에 P씨가 나와 친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차법사에게 이 물건을 전해 주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P씨는 “귀중한 물건 같은데 이회장님이 직접 전해주시지 그러세요?”하고 거절을 했는데 차일피일 시간이 흘렀다가 급작스런 부고를 받게 되었다. 가족들은 부랴부랴 장례를 치르고서야 미국 출장을 다녀온 P씨에게 이 사실을 전해 듣고 나에게 연락을 취했던 것이다.
고인이 당부한 물건은 다름 아닌 주장자였다. 주장자는 선사(禪師)들이 좌선할 때에나 설법할 때에 가지고 있는 지팡이다. 가슴까지 오는 장정 팔뚝 굵기의 곧게 뻗은 주장자였다. 검은 옻칠이 된 한 주장자는 어찌 보면 도깨비 방망이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집 한 채를 거뜬히 떠 바칠 수 있는 묵직한 기둥 같았다. 누가 봐도 범상치 않은 주장자의 유래를 전해 듣고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계룡산 자락에 자리 잡은 ‘개태사’ 마당에서 나온 주장자라는 것이었다.
고인이 생전에 남긴 개태사 주장자의 유래는 이랬다. 고려를 창건한 태조 왕건은 지금의 논산에 개태사를 창건했다. 개태사 자리는 나당연합군과 계백이 최후의 결전을 벌였던 황산벌과도 인접하였고, 왕건이 후백제의 신검과 최후의 일전을 벌였던 일리천(一利川) 전투의 주요한 전장이었다. 한편으로 후삼국 통일 직후 후백제의 견훤이 황산(黃山,지금의 연산)의 작은 절에서 병으로 죽었는데, 이 절이 개태사자리라는 설도 있다.
태조가 후백제를 평정하고 이를 기념하고 최후의 전승지 자리에 개태사를 세운 데는 백제인들의 민심을 달래기 위한 명분을 넘어 큰 뜻이 숨어 있었다. 바로 태조를 도와 나라를 세운 도선국사의 충고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 반신반인(半神半人)인 도선국사는 875년 '지금부터 2년 뒤에 반드시 고귀한 사람이 태어날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예언대로 송악에서 왕건이 태어났다고 한다.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도선국사는 왕건의 정신적 지주였음은 틀림없다.
고구려를 계승하고 새로운 통일된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도선국사는 태조에게 계룡산자락에 개태사(開泰寺)를 세우라고 했다. 대규모로 창건된 개태사는 태조의 초상화를 봉안한 진전(眞殿)이 세우는 일을 시발로 왕실의 조상숭배를 통해 고려 왕실을 보호하는 특별한 기능을 담당했다. 고려 500년 왕조는 개태사에서 나고 마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조선에 들어서 숭유억불정책으로 개태사는 쇄락을 거듭하다 폐사하기에 이르렀고 절터만 남게 되었다. 그러다 1930년에 그 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다른 이름으로 사찰이 중창되었다. 그런데 근래 들어 본래 절터를 재건하는 대대적인 발굴이 있었는데 이 과정에 이규행회장이 깊이 관여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개태사 터에는 지금도 대형 가마솥(철확), 석탑, 석상 등 보물이 많은데, 절을 지키던 한 보살의 꿈에 도선국사가 현몽했다고 한다. 하도 생생하고 이상한 꿈이었는데, 그날 옛 절의 마당에서 긴 나무를 하나 파냈다. 그것이 바로 그 주장자였다. 사람들은 그 주장자가 틀림없이 개태사 창건당시 함께 묻은 도선국사의 주장자라고 했고, 이회장 또한 그렇게 굳게 믿었다. 도선국사의 선맥이 대대로 전한다는 뜻으로 개태사에 도선국사의 주장자를 묻었다는 것이다.
1천년이 넘어 다시 세상에 나온 주장자는 잘 썩지 않는 재질에 옻칠을 해서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이회장은 그 주장자에 다시 정성들여 옻칠을 입혀 그동안 둘도 없이 소중한 보물로 애지중지 보관해왔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선학의 큰 족적을 남기고 불현듯 세상을 떠난 것이다.
고인이 떠나고 꼭 한 달이 지난 10월 10일, 고인의 따님이 대학로 내 선방으로 나를 찾아왔다. 교회 집사이기도한 그녀는 내게 직접 그 주장자를 전해주었다. 주장자를 전달받은 자리에서 나는 만감이 교차했다.
‘당신은 왜 자기를 따르던 그 많은 후학들을 뿌리치고 당신 최고의 보물을 내게 줄 생각을 했을까? 내가 이것으로 무엇을 하란 말인가?’
큰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커다란 숙제 떠 앉은 것이다.
이날 선방에 모인 분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사자가 사는 굴속에는 다른 짐승은 살 수 없습니다. 원효대사가 말년에 소성거사로 환속하여 소박하게 삶을 마감하고, 선풍을 휘날리던 경허대선사가 말년에 오지로 들어가 환속하여 서당 훈장으로 이름 없이 세상을 떠난 의미를 생각해봅니다. 하나가 전체이고, 전체가 하나입니다.”(hooa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