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역사학자이자 경영학자인 파킨슨에 따르면 공무원 수는 해야 할 일의 비중,극단적으로는 일의 유무와 전혀 상관없이 단지 늘려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일정 비율로 증가한다. 1955년 이런 파킨슨 법칙은 이코노미스트지에 소개되면서 '큰 정부'의 비효율을 비판하는 유용한 논거로 활용돼 왔다. 만약 파킨슨이 우리나라 방송통신위원회를 지금 와서 봤다면 뭐라고 했을까. 미처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사례를 보고는 매우 흥분했을지 모른다.

방통위가 이명박 대통령에 보고한 업무내용을 보면 방송통신분야 전문규제기관인지,아니면 산업진흥 부처인지 도무지 분간하기 어렵다. 신성장동력으로 방송통신산업 육성, 5년간 일자리 29만개 창출,투자활성화로 2012년까지 생산액 116조원 증가 견인 등 내세운 제목들을 보면 영락없는 과거 정보통신부 업무보고다.

이명박 정부 들어 정부조직이 개편되면서 정통부 주요 업무는 지식경제부와 방통위로 흡수됐다. 지식경제부는 정보통신을 과거 산자부가 다루던 산업과 함께 놓고 새로운 성장동력을 설계하고,방통위는 방통융합에 걸맞게 법과 제도를 제대로 정비하라는 게 그 취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방통위가 하겠다는 일들을 보면 그 정체성이 뭔지 알 수가 없다.

업무보고에는 물론 방통위만이 할 수 있는 일들도 있다. 방송서비스 시장의 선진화를 위해 대기업 진입제한,겸영제한,지분제한 등 각종 규제를 정비하고,디지털 전환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는 것이 그렇다. 또 통신서비스 투자활성화를 위해 와이브로 인터넷전화 등 신규 서비스를 활성화하고 경쟁을 촉진하겠다는 것과,주파수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겠다는 것 등도 여기에 해당된다.

그러나 방통융합에 이르면 슬그머니 산업진흥 부처임을 선언하고 있다. IPTV(인터넷 멀티미디어방송) 사업자 허가나 규제정비 차원을 넘어 IPTV산업 자체를 자신들이 담당하겠다는 것이다. 콘텐츠의 제작ㆍ유통ㆍ활용 지원을 들고 나오는가 하면, 원천기술 개발과 새로운 서비스 발굴도 하겠다고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정책자금이 필요하니 과거 정통부가 관리하던 정보통신진흥기금(지금은 지경부로 이관)도 달라고 한다. 게다가 수출유망국가들을 대상으로 와이브로,DMB 등에 대한 해외 로드쇼도 하고,콘텐츠의 해외 신규시장을 개척할 계획도 밝혔다. 문화부(콘텐츠) 지경부(기술개발) 등의 반발을 예상했는지 부처 간 협의체를 만들겠다는 말을 뒤에 덧붙이면서 말이다.

규제기관이 성장동력에 관심 갖는 것 자체를 잘못됐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규제기관은 규제기관으로서 할 일이 있고,그것만으로 벅차다. IPTV만 해도 기술개발이나 산업진흥이 아니라 정작 규제가 발목을 잡았던 것이고 보면 특히 그렇다. 방통위는 방송,통신,그리고 방송통신융합 분야에서 이런 규제만 제대로 운용해도 얼마든지 성공한 기관이 될 수 있다.

그런데도 방통위는 왜 그토록 산업진흥에 집착하는 것일까. 기업들은 공정위와 방통위 갈등도 괴로운 판에 과거 산자부 정통부처럼 방통위 지경부 문화부가 서로 갈등하면 그것처럼 곤혹스러운 일도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만에 하나 방통위가 과거 정통부의 역할을 노리고 있다면 방통위의 규제 권한이 자기조직의 영역확장에 이용되는,정말 어이없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안현실 논설ㆍ전문위원 경영과학博 a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