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예산옹기는 4대에 걸쳐 150년 동안 옹기를 구워왔다.

창업주인 황춘백 옹(사망연도 미상)이 1855년 전국의 흙을 찾아 다니는 떠돌이 옹기장이가 된 이후 2대인 황동월 옹(1957년 작고)도 전국을 다니며 가마를 짓고 옹기를 구웠다. 현재 3대 황충길 대표가 가업을 맡고 있다. 황 대표는 1988년 대한민국 명장(옹기)으로 지정됐다.

충북 영동군 출신인 조부 황춘백 옹은 천교학(천주교) 신자였다. 그는 천주교 탄압을 피해 옹기장이가 됐다.

옹기를 굽는 가마 안에 모여 예배를 드릴 수 있고 가마를 따라 주기적으로 거주지를 옮기기 쉽기 때문이다.

천주교를 믿다가 잡히면 온가족이 몰살당했던 만큼 당시 옹기장이들의 95% 이상이 천주교 신자였다고 한다.

조부로부터 일을 배운 황 대표의 부친은 1957년 옹기를 굽다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황 대표는 17세의 나이에 옹기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비록 5남매 중 막내였지만 형이나 누나들은 군대에 있거나 출가한 상황이었다. 황 대표는 "어머님을 모시기 위해 '해본 게 도둑질'이라 옹기 사업에 뛰어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좋은 흙을 찾아 전국을 떠돌아 다녔다. 그러던 중 1975년 가마터를 마련해 자리잡은 곳이 지금의 예산군 오가면 오촌리 점촌마을.10평 남짓한 목조건물 공장에서 하루 3시간씩 밖에 못자며 일했다. 옹기는 죄인들이 만드는 것이라는 세상의 인식이 싫었던 탓에 집 한 칸만 마련하면 옹기장이 짓을 그만두겠다고 마음먹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황 대표는 "35세까지만 한다고 마음먹고 있으면 모친이 병에 걸려 수술비가 필요해 더하게 되고 45세까지만 하려고 하니 또 집안에 우환이 생겨 그만 둘 수가 있었어야지"라며 "내가 세상에서 할 일은 옹기 만드는 일이라고 이미 하늘이 정해놓았던 게야"라고 회고했다.



황 대표는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백제요업이란 회사 이름으로 옹기 사업을 했다. 옹기가마가 많았던 예산에서 옹기장이들이 사라져가는 현실을 안타까워한 나머지 예산옹기의 전통을 잇는다는 의미에서 1984년 사명을 전통예산옹기로 바꿨다.

1996년 11월 그가 개발한 냉장고형 김칫독이 제1회 농민의날 행사에서 '민속공예부문 국무총리상'을 받으면서부터 사업은 상승세를 탔다. 그때서야 황 대표는 옹기 제작이 자신의 천직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수상 이후 신문과 방송을 통해 이름이 알려지자 예산옹기를 찾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다. 대형 백화점에 고정 부스가 마련됐고,홈쇼핑과 각종 박람회,전시회를 통해서 옹기들이 팔려나갔다. 가장 주문이 많았던 1998년,1999년에는 한번에 1억5000만원씩 주문이 들어와 연간 15억원 이상의 매출을 기록했다. 재미 교포들에게까지 소문이 나 워싱턴,뉴욕에 옹기를 컨테이너에 가득 채워 수출할 정도였다. 현재는 연 12억원 정도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지금이야 전통옹기의 우수성이 잘 알려져 있지만 옹기가 사람들에게 인정 받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1960년대부터 1984년까지는 이른바 '광명단 사건'으로 옹기의 암흑기가 계속됐다. 옹기에 윤기를 내기 위해 바르는 유약인 광명단에 납성분이 검출되자 정부에서 옹기장이들을 다 잡아 가두었던 것.

김 대표는 3년을 연구해 개발한 전통 잿물을 천연 유약으로 사용했지만 소비자들의 불신으로 옹기가 전혀 팔리지 않았다. 이 기간 중 전국 470여 군데 있던 옹기공장이 40여 군데밖에 남지 않게 됐을 정도다. 황 대표는"어려울 때 마을사람들한테 700만원 정도를 빌려썼는데 주변의 빚진 옹기장이들이 다들 도망가니 빚쟁이들이 돈 내놓으라고 매일같이 찾아와 피가 바싹바싹 말랐다"며 "전 재산을 나눠가지라고 하고 마을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죽도록 고생한 황충길이 이렇게 마을을 떠나면 너무 억울하다며 3년간 상환을 유예해줬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황대표는 새로운 옹기 개발을 멈추지 않았다. 질 좋은 점토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닌 것은 물론이거니와 5박6일 동안 가마를 굽고 2일간 식혔던 공정을 한나절 반으로 단축했다. 이처럼 공정을 단순화하면서도 조부 때부터 이어지는 장인 정신만은 그대로 이어갔다. 황 대표는 남들이 보면 멀쩡해보이는 옹기라도 자신의 기준에 조금이라도 흠이 있는 제품은 그 자리에서 모두 박살낸다. 현재 전통예산옹기는 황 대표의 막내 아들인 황진영 과장이 1995년부터 4대째 가업을 이을 준비를 하고 있다. 황 과장은 당초 가업승계를 반대했던 부친을 "한국 최고의 옹기전문가가 되겠다"고 설득한 끝에 옹기장이의 길을 걷게 됐다.

황 대표는 "옹기는 미세한 구멍들을 통해 숨을 쉬면서도 내용물의 열과 특성을 보존하는 우리 조상의 최고 발명품"이라며 "내년 9월 세계 40개국의 옹기가 참여하는 세계 옹기 엑스포가 울산시에서 열리면서 전통옹기의 우수성이 다시 한번 재조명될 것"이라고 말했다.

예산(충남)=황경남 기자 knhw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