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전부터 후계자 '얼굴 알리기' 나서야

종이봉투 생산업체인 A사는 최근 모 제지업체로부터 "앞으로 100% 현금으로 선결제해야만 종이를 공급하겠다"는 구두 통보를 받았다. 이메일이 활성화되면서 봉투 수요가 크게 줄어든 데다 최근 1년 사이 생산원가가 30% 이상 오른 점을 감안해 '혹시 납품대금을 떼이지 않을까' 걱정한 제지업체가 미리 손을 쓴 것이다.

하지만 이화산업사는 예외다. 예전처럼 현금 결제와 함께 어음 결제를 병행한다. 종이를 공급받은 뒤 정해진 날짜에 대금을 납부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경영의 책임을 지고 있는 최훈 사장은 이화산업사가 특별대우를 받는 이유로 창업주인 아버지(최동현 회장) 대부터 쌓은 '35년 신용'을 꼽았다. 창업 이래 결제대금을 밀린 적이 없는 이화의 '신용'이 자신에게 대물림됐다는 점을 인정 받았기 때문이란 얘기다.

최 사장은 "2004년부터 3년 동안 후계자 교육을 받을 때 아버지가 가장 강조한 것은 '약속은 무조건 지켜라'였다"며 "'사람은 바뀌어도 신용은 변하지 않는다'는 점을 대표에 오르기 3년 전부터 사내외에 적극 알린 덕분에 가업승계가 이뤄진 뒤에도 큰 어려움은 겪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신용 대물림' 없이 2세에게 경영권을 넘긴 중소기업 중에는 승계와 함께 급격하게 사세가 기우는 곳이 많다. 공장 생산설비 등 '껍데기'는 물려줬지만,창업주가 공들여 쌓은 신용 인맥 노하우 등 '알맹이'는 전수되지 않은 탓이다.

윤용운 기은컨설팅센터 차장은 "많은 기업들이 '창업주는 믿을 만한 사람이어서 거래했지만 자식은 어떨지 모르겠다'며 가업승계 뒤에 거래 조건을 강화하거나 아예 거래를 끊는다"며 "이렇게 '안면장사'가 중요한데도 상당수 창업주들은 회사를 넘기는 마지막 순간에야 자신의 인맥을 넘기곤 한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결국 가업승계의 핵심은 창업주가 사내외에서 쌓은 신용을 얼마나 잘 물려주느냐에 달려 있다고 강조한다. 2세 경영인이 가장 먼저 신용을 쌓아야 할 대상은 내부 임직원이다. 남영호 건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가능한 빨리 2세를 말단사원으로 입사시켜 임직원들과 오랜 기간 호흡을 맞추게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거래처 등과의 '신용 쌓기'는 최소 가업승계 3년 전부터 시작돼야 한다. 납품업체 유통망 등 핵심 거래처→은행 보증기관 등 금융회사→동종업계 정부 등 제3의 네트워크 순서로 '얼굴 알리기'에 나서는 게 좋다.

이때 창업주들이 직접 후계자 손을 잡고 방문하는 건 기본.후계자를 가리키며 "이 사람이 회사를 이어받을 것"이라며 힘을 실어 주는 게 바람직하다. 주요 거래 기업의 핵심 인물을 상대하는 노하우를 알려 줄 때는 '회장님'이 아닌 '아버지'의 입장에서 친절하게 가르쳐 주자.2세들도 거래처들이 동요하지 않게 끊임없이 찾아다니며 '나도 아버지만큼 믿을 만한 사람'이란 인상을 심기 위해 노력해야 함은 물론이다.

오상헌 기자 oh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