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代를 잇는 家嶪] (17) 금성다이아몬드 ‥ 유리 절단기 세계시장 선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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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구조대도 "기술 알려달라"
"영화를 보면 유리를 동그랗게 오려 문을 따는 장면이 나오죠.하지만 유리를 가공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게 새빨간 거짓말이란 사실을 잘 알죠.유리를 자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작업인지는 해 보지 않고는 몰라요."
강길박 금성다이아몬드 대표(65)는 인천 남동구 고잔동 본사 공장에서 유리 절단용 칼을 보여주며 "119구조대에서도 유리 오리는 기술을 알려 달라고 했다"고 말하면서 웃음 지었다.
얼핏 들으면 보석상 이름으로 착각할 만한 금성다이아몬드라는 회사명은 유리 절단기의 끝에 붙는 핵심 부품인 다이아몬드에서 착안해 지어졌다.
회사는 현재 작은 다이아몬드를 붙여 유리를 자르는 유리 절단기,금속 가루에 다이아몬드 가루를 섞어 가공한 유리 연마기와 대형 유리를 진공으로 흡착해 건물이나 자동차에 유리를 조립할 때 쓰는 유리용 진공흡착기를 포함,200여 가지 제품을 생산 중이다.
금성다이아몬드는 국내 유리 절단기와 유리용 진공흡착기 시장에서 매출 1위를 기록 중이며 뚜렷한 경쟁 기업이 없을 정도로 독보적인 지위를 점하고 있다.
칼로 유명한 독일 일본을 비롯 전 세계 40개국에도 유리 절단용 칼과 흡착기를 수출하는 등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는 상태다.
특히 유리 절단기의 세계 시장 점유율은 약 30%로 당당 1위다.
◆아버지는 만들고 아들은 팔고
창업주 고(故) 강갑길 회장(1913년생.1981년 작고)은 일제시대 일본의 유명한 유리공구 회사인 '미쓰코시(三越) 다이아몬드'에서 기술을 익혀 당대 최고의 기술자로 이름을 날렸다.
20대 중반에는 오사카에서 '오사카다이아몬드'라는 유리 가공업체를 만들어 큰돈을 벌기도 했다.
하지만 귀국 후 6. 25전쟁 등을 겪으며 전 재산을 잃게 된다.
강 회장은 몇 차례 재기를 노렸으나 1950~60년대만 해도 유리 가공 용구에 대한 수요가 없어 뜻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강 대표는 "집안이 어려워 행상도 해 봤다가 월남전에 참전해 월급을 한 푼도 안 쓰고 집으로 송금하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강 대표는 1968년 제대 후 아버지를 설득해 가내 수공업 형태의 유리 가공업체를 세웠다.
아버지는 집에서 물건을 만들고 아들은 자전거를 타고 영업을 다녔다.
아버지가 손수 만든 만큼 품질에는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국산에 대한 안 좋은 인식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국내에서 가장 큰 유리 유통업체였던 한국유리의 국내 총판 대리점 사장이 금성다이아몬드의 유리 절단용 칼을 판촉 용품으로 주문했던 것.강 대표는 "장사가 되려고 했던지 판촉물을 써 본 사람들이 대체 어디 제품이냐고 했다는 거예요"라며 "한국유리 대리점 사장이 독일제라고 거짓말을 했다지 뭡니까."
국산에 대한 편견이 만들어 낸 해프닝이긴 했지만 금성다이아몬드의 제품이 독일제로 보일 만큼 품질이 뛰어났던 것이다.
강 대표는 "그때부터 없어서 못 팔 정도가 됐다"며 "잘 팔리는 것도 좋았지만 국산 제품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는 계기가 된 것이 더 기뻤다"고 회상했다.
◆유리 절단기를 넘어 흡착기까지
강 대표는 유리 절단기 영업차 해외를 다니다가 1980년대 초 독일에서 우연히 유리용 진공흡착기와 마주치게 됐다.
당시 국내에서 쓰이던 유리용 흡착기는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강 대표는 이후 독일 업체와 기술 제휴를 맺고 유리 흡착기 개발에 매달렸다.
처음에는 주변에서 반대가 심했다.
유리 절단기 생산도 벅찬데 왜 다른 일을 하느냐는 것이었다.
강 대표는 "저런 부품 정도는 국내에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밀어붙였다"고 말했다.
몇 달간 밤낮으로 매달려 우여곡절 끝에 제품을 개발했지만 초기 제품은 흡착용 고무가 눌어붙는 하자에 직면했다.
강 대표는 "300군데가 넘는 곳을 다니며 일일이 수리해 주었다"고 말했다.
현재 국내 생산 및 건설 현장에선 대부분 금성다이아몬드의 유리 흡착기를 사용 중이다.
강 대표는 1981년 강 회장이 작고한 후 대표로 취임했다.
이후 강 대표가 새로운 제품 개발과 더불어 가장 서두른 일은 공장의 기계화였다.
강 대표는 별도의 기계 개발 부서를 신설,생산 기계를 개발하고 생산 능률을 높이는 데 주력했다.
이전까지는 주로 수작업을 통해 생산했다.
지금도 금성다이아몬드에서 쓰는 기계는 대부분 회사가 자체 개발한 것이다.
연간 약 100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기업이 됐지만 회사가 커 나가는 과정에서 어려움도 많았다.
강 대표는 경쟁 업체에서 금성다이아몬드가 다이아몬드를 밀수한다는 제보를 해 경찰이 덮쳤는데 모래알 같은 원료용 다이아몬드만 보고 돌아갔던 일과 공장을 지어 놨던 인천 간석동 일대가 주거 지역으로 형질이 변경돼 쫓겨나듯 인천 고잔동으로 이사 왔던 일 등을 꼽았다.
회사에는 강 대표의 아들인 강재호씨가 전무로 근무하고 있다.
강 대표는 "표면상으로야 제가 대표이지만 실제로는 아들이 경영에 나서고 있다"며 "추진력 있는 좋은 후계자를 둬 든든하다"고 치켜 세웠다.
임기훈 기자 shagger@hankyung.com
"영화를 보면 유리를 동그랗게 오려 문을 따는 장면이 나오죠.하지만 유리를 가공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게 새빨간 거짓말이란 사실을 잘 알죠.유리를 자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작업인지는 해 보지 않고는 몰라요."
강길박 금성다이아몬드 대표(65)는 인천 남동구 고잔동 본사 공장에서 유리 절단용 칼을 보여주며 "119구조대에서도 유리 오리는 기술을 알려 달라고 했다"고 말하면서 웃음 지었다.
얼핏 들으면 보석상 이름으로 착각할 만한 금성다이아몬드라는 회사명은 유리 절단기의 끝에 붙는 핵심 부품인 다이아몬드에서 착안해 지어졌다.
회사는 현재 작은 다이아몬드를 붙여 유리를 자르는 유리 절단기,금속 가루에 다이아몬드 가루를 섞어 가공한 유리 연마기와 대형 유리를 진공으로 흡착해 건물이나 자동차에 유리를 조립할 때 쓰는 유리용 진공흡착기를 포함,200여 가지 제품을 생산 중이다.
금성다이아몬드는 국내 유리 절단기와 유리용 진공흡착기 시장에서 매출 1위를 기록 중이며 뚜렷한 경쟁 기업이 없을 정도로 독보적인 지위를 점하고 있다.
칼로 유명한 독일 일본을 비롯 전 세계 40개국에도 유리 절단용 칼과 흡착기를 수출하는 등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는 상태다.
특히 유리 절단기의 세계 시장 점유율은 약 30%로 당당 1위다.
◆아버지는 만들고 아들은 팔고
창업주 고(故) 강갑길 회장(1913년생.1981년 작고)은 일제시대 일본의 유명한 유리공구 회사인 '미쓰코시(三越) 다이아몬드'에서 기술을 익혀 당대 최고의 기술자로 이름을 날렸다.
20대 중반에는 오사카에서 '오사카다이아몬드'라는 유리 가공업체를 만들어 큰돈을 벌기도 했다.
하지만 귀국 후 6. 25전쟁 등을 겪으며 전 재산을 잃게 된다.
강 회장은 몇 차례 재기를 노렸으나 1950~60년대만 해도 유리 가공 용구에 대한 수요가 없어 뜻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강 대표는 "집안이 어려워 행상도 해 봤다가 월남전에 참전해 월급을 한 푼도 안 쓰고 집으로 송금하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강 대표는 1968년 제대 후 아버지를 설득해 가내 수공업 형태의 유리 가공업체를 세웠다.
아버지는 집에서 물건을 만들고 아들은 자전거를 타고 영업을 다녔다.
아버지가 손수 만든 만큼 품질에는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국산에 대한 안 좋은 인식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국내에서 가장 큰 유리 유통업체였던 한국유리의 국내 총판 대리점 사장이 금성다이아몬드의 유리 절단용 칼을 판촉 용품으로 주문했던 것.강 대표는 "장사가 되려고 했던지 판촉물을 써 본 사람들이 대체 어디 제품이냐고 했다는 거예요"라며 "한국유리 대리점 사장이 독일제라고 거짓말을 했다지 뭡니까."
국산에 대한 편견이 만들어 낸 해프닝이긴 했지만 금성다이아몬드의 제품이 독일제로 보일 만큼 품질이 뛰어났던 것이다.
강 대표는 "그때부터 없어서 못 팔 정도가 됐다"며 "잘 팔리는 것도 좋았지만 국산 제품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는 계기가 된 것이 더 기뻤다"고 회상했다.
◆유리 절단기를 넘어 흡착기까지
강 대표는 유리 절단기 영업차 해외를 다니다가 1980년대 초 독일에서 우연히 유리용 진공흡착기와 마주치게 됐다.
당시 국내에서 쓰이던 유리용 흡착기는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강 대표는 이후 독일 업체와 기술 제휴를 맺고 유리 흡착기 개발에 매달렸다.
처음에는 주변에서 반대가 심했다.
유리 절단기 생산도 벅찬데 왜 다른 일을 하느냐는 것이었다.
강 대표는 "저런 부품 정도는 국내에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밀어붙였다"고 말했다.
몇 달간 밤낮으로 매달려 우여곡절 끝에 제품을 개발했지만 초기 제품은 흡착용 고무가 눌어붙는 하자에 직면했다.
강 대표는 "300군데가 넘는 곳을 다니며 일일이 수리해 주었다"고 말했다.
현재 국내 생산 및 건설 현장에선 대부분 금성다이아몬드의 유리 흡착기를 사용 중이다.
강 대표는 1981년 강 회장이 작고한 후 대표로 취임했다.
이후 강 대표가 새로운 제품 개발과 더불어 가장 서두른 일은 공장의 기계화였다.
강 대표는 별도의 기계 개발 부서를 신설,생산 기계를 개발하고 생산 능률을 높이는 데 주력했다.
이전까지는 주로 수작업을 통해 생산했다.
지금도 금성다이아몬드에서 쓰는 기계는 대부분 회사가 자체 개발한 것이다.
연간 약 100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기업이 됐지만 회사가 커 나가는 과정에서 어려움도 많았다.
강 대표는 경쟁 업체에서 금성다이아몬드가 다이아몬드를 밀수한다는 제보를 해 경찰이 덮쳤는데 모래알 같은 원료용 다이아몬드만 보고 돌아갔던 일과 공장을 지어 놨던 인천 간석동 일대가 주거 지역으로 형질이 변경돼 쫓겨나듯 인천 고잔동으로 이사 왔던 일 등을 꼽았다.
회사에는 강 대표의 아들인 강재호씨가 전무로 근무하고 있다.
강 대표는 "표면상으로야 제가 대표이지만 실제로는 아들이 경영에 나서고 있다"며 "추진력 있는 좋은 후계자를 둬 든든하다"고 치켜 세웠다.
임기훈 기자 shagg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