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명문 축구팀 아약스 홈구장(아레나 스타디움)이 있는 암스테르담 베일머드레이프 지역 ING 본부 빌딩.오렌지 색의 이 건물 6층에서 근무하는 노무 담당자 마틸더 레인처스(38)와 아우드레이 크레이머(41)는 직함이 똑같다.

'Manager,Labour Relations(노무 관리자)'가 그것.두 여성 매니저 명함 속에 새겨진 세부 업무 내용도 인력 관리(HR),보상ㆍ복리후생(Compensations & Benefits),노무(Labour Relations) 등으로 동일하다.

크레이머씨는 "일주일에 3,4일씩만 출근하며 노무관리 업무를 2명이 나눠서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금융그룹 ING의 네덜란드 지역 내 근로자 수는 모두 3만3000여명.이 중 레인처스씨나 크레이머씨와 같이 파트 타임으로 일하는 직원이 전체의 20%인 6600여명에 달한다.

홍보 담당자 데비 브란트씨는 "임원 중에도 시간제 근무자가 있다"고 전했다.

'시간당 노동 생산성,유럽 평균 대비 21% 상회''1980년대 10%에 달했던 실업률 2%대로 하락'…. 유럽의 대표적인 강소국으로 지칭되는 네덜란드의 최근 경쟁력을 보여주는 주요 경제 지표들이다.

실제 최근 몇 년간 경제와 고용 사정이 크게 좋아지면서 인력난을 호소하는 기업까지 생겨나고 있다는 게 네덜란드 현지 기업인들의 설명이다.

과도한 사회보장과 높은 실업률로 대표되는 '네덜란드 병(Dutch Disease)'으로 고전하던 네덜란드가 이처럼 1인당 국내총생산(GDP) 4만달러가 넘는 강국으로 부상한 배경에는 ING와 같은 대기업까지 적극 활용하는 '자발적 파트타임제'가 자리하고 있다.

시작은 198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루드 루버스 총리는 높은 실업률로 인한 경제 침체를 해결하기 위해 임금인상 억제,노동시장 단축,일자리 공유,사회보장 완화 등을 골자로 한 노ㆍ사ㆍ정 대타협을 끌어 냈다.

이른바 '바세나르 협약'이다.

네덜란드는 이후 10여년간의 시행착오 끝에 1996년 '시간제 근로자 차별금지 규정'과 2000년 '근로자 노동시간 단축 요구권' 등을 잇따라 도입,노동시장 유연화를 매듭 지었다.

실제 네덜란드 근로자들은 자신의 필요에 따라 근무 시간을 늘리고 줄인다.

ING에서 20년째 근무 중인 크레이머씨도 일주일에 4일,24시간만 근무한다.

자식 세 명을 키우면서 직장 일도 함께 하기 위해 2000년 근무 시간을 이같이 조정했다.

1988년 입사 당시엔 그녀도 주 40시간(풀타임 36~40시간)을 꽉 채워 일했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나면서 근무 시간을 두 차례 바꿨다.

크레이머씨와 업무를 나눠 하고 있는 레인처스씨도 마찬가지.변호사인 그녀는 2000년 ING에 처음 들어왔을 때 36시간 풀타임 근로자였으나 두 번째 아이가 생긴 2002년부터 주 28시간으로 줄여 일하고 있다.

연초에 미리 상사와 협의하면 근무시간 조정은 언제라도 가능하다고 이들은 말했다.

시간제 근로자에 대한 차별은 없다.

레인처스 매니저는 "(자신의 경우도) 임금 상여금 휴가 등이 근무 시간에 비례해서 줄어들 뿐 전일 근무자에 비해 불이익을 보는 일은 없다"고 강조했다.

정희정 암스테르담노동연구소 연구원은 "임금뿐만 아니라 교육 훈련 등의 지원도 전일 근무자와 차별이 없도록 법적 장치가 마련돼 있다"며 "이 때문에 파트타임제를 지원하는 남성들도 늘어나는 추세"라고 말했다.

6600여명의 네덜란드 ING 시간제 근무자 가운데 정규직이 94%에 달하는 점이 이를 잘 보여준다.

시간제에 대한 차별이 없다 보니 자발적인 파트타임 근로자가 늘어나면서 업무 생산성이 올라가고 전반적인 실업률은 떨어지는 선순환 구조까지 만들어지고 있다.

네덜란드 파트타임 근로자는 700여만명의 전체 취업자 중 45.5%에 달하고 있다.

스웨덴 독일 덴마크 등 다른 유럽 국가들의 2배 규모다.

특히 여성 시간제 근로자 비중은 74%나 되며 남성도 22%를 넘어섰다.

유럽연합(EU) 통계기구인 유로스타트에 따르면 네덜란드 시간제 근로자 가운데 비자발적으로 파트 타임을 택한 직원은 3.8%밖에 안 된다.

스스로 선택한 시간제인 만큼 노동 생산성도 뛰어나다.

네덜란드 근로자들의 시간당 생산성은 EU 평균보다 21%나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유로스타트 2006년 조사).근무 시간을 줄여 일자리를 공유하다 보면 업무 생산성이 떨어질 수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 ING의 크레이머와 레인처스 매니저는 "원하는 시간에 압축적으로 일할 수 있어 업무처리 속도가 오히려 빠르다"고 입을 모았다.

어려운 사안에 대해서는 파트너와 충분히 대화하기 때문에 업무 인수ㆍ인계도 문제 없다고 덧붙였다.

네덜란드 사용자단체 AWVN의 야네스 반더 벨드 대변인은 "노동시장 유연성을 높이기 위해 도입한 파트타임제가 이젠 네덜란드 일자리 창출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며 "실제 올 1분기 실업률이 2.8%로 낮아졌다"고 밝혔다.

구인난을 겪는 중소기업들까지 생겨나 직원들의 근무 시간을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도 일부 경영진 사이에서 나오고 있다고 벨드 대변인은 소개했다.

■ 특별취재팀 : 도쿄(일본)=윤기설 노동전문 /암스테르담(네덜란드)=김철수 /런던(영국)=김동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