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기사는 BizⓝCEO 기획특별판 입니다 >

지난 20일 오전 10시 서울 A백화점의 고객만족센터.

"접근 방법에 문제가 있었네요. 고객이 따지거나 불평할 때는 우선 고객의 처지를 인정해준 뒤 차근차근 설명해야 합니다. 고객의 요구가 정당하면 즉각 용서를 빌고 성의를 다해 더 큰 언쟁으로 발전하지 않도록 해야 문제가 해결되지요."

K 팀장의 말에 모여 있던 담당 사원 20여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무실은 매일 오전 9시반부터 약 1시간반 동안 강의실 겸 상담장으로 변한다.

A백화점이 새로 도입한 '영업력 향상 프로그램'에 따라 아침조회와 팀 미팅 등에서 전날 실적을 분석하고 부족한 점을 보완하는 것이다.

영업사원 개인의 능력에만 의존하던 기업의 영업 방식이 변하고 있다.

컨설팅회사와의 상담을 거쳐 체계적인 교육 과정을 만들고 우수 영업 노하우를 '매뉴얼'로 작성해 전체 영업사원의 능력을 높이는 시도가 거의 모든 업종에 걸쳐 확산되고 있다.

'매뉴얼'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제품의 사용설명서다.

매뉴얼을 잘 만들기는 쉽지 않다. 특히 정보ㆍ통신기기의 사용설명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악명이 높다.

둘째는 교본 또는 교범이다.

특정 조직에 속한 사람들이 다양한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방법을 모아놓은 책자다. 대표적인 매뉴얼이 야전교범(Field Manual)이다. 예상되는 각종 상황에서 군인들이 해야 할 행동을 체계화한 것으로,신체 각 부분의 동작과 초 단위 시간계획까지 들어 있다.

'에프엠(FM)대로 하라'는 말도 여기에서 나왔다.

세계 최강이라는 미국 육군은 500종이 훨씬 넘는 야전교범을 갖고 있다고 한다.

매뉴얼은 기업세계에서도 꼭 필요하다.

회사를 성장시키기 위한 매뉴얼을 CEO와 직원이 같이 숙지하고 몸에 밸 정도로 연습하되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어야 시행착오가 적다.

일본 금형업체인 '잉크스'는 설계에서 금형생산까지의 공정을 10분의 1~24분의 1로 단축하는 공정혁신의 매뉴얼을 구현함으로써 휴대전화 금형 생산 소요기일을 45일에서 45시간으로 단축할 수 있었다.

매뉴얼은 꼭 필요하지만 그대로 하는 게 최선의 결과를 낳는다는 보장은 없다.

모든 상황을 다 상정할 수도 없거니와 기업의 대응 능력도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매뉴얼에 얽매이다 보면 창의성이 떨어져 오히려 일을 그르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중소기업의 기술혁신시스템을 평가하는 매뉴얼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기술 혁신적 R&D능력과 기술 사업화 능력,혁신경영 능력 등이 그것이다.

기술혁신능력으로는 연구개발(R&D) 투자비중이 높아야 한다.

기술사업화 능력으로는 제품개발 매뉴얼을 확보해야 하고 기술표준화 수준과 신규 거래 선도 확보해야 한다.

이 평가 매뉴얼에 따라 점수를 매겨보면 자기 회사의 기술혁신 수준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된다.

최근 들어 생산 현장을 넘어 마케팅,국외진출 등 기업 운영의 총체적인 노하우를 집대성한 매뉴얼로 성공을 거두는 기업들이 주목받고 있다.

특히 국외 사업에 활발한 기업들의 경우 '매뉴얼이 없으면 도태된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업무의 매뉴얼화(化)를 서두르고 있다.

삼성은 2001년부터 자잘한 일상 업무를 상기시켜주고,업무 절차를 알려주는 매뉴얼을 도입했다.

LG전자는 2006년 레바논에서 전쟁이 터졌을 때 서방의 주요 기업보다도 빨리 이틀 만에 주재원 가족 6명을 전원 탈출시켰다.

'차량 안에 송수신이 가능한 무전기와 사이렌을 준비 한다' '출퇴근 코스를 자주 바꾸라' 등 첩보원의 행동지침을 방불케 하는 국외 근무자 신변 안전 매뉴얼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국적 기업들 가운데 매뉴얼을 잘 갖춰놓은 대표적인 사례가 맥도날드다.

이 회사에는 매뉴얼만 5만개가 있다.

햄버거 두께에서부터 매장 색깔,직원들이 건네는 인사말,쓰레기 처리,대외 협력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매뉴얼로 만들었다.

덕분에 초등학교만 나온 사람이라도 세계 어디서나 똑같은 햄버거를 만들 수 있다.

고객은 언제나 떠날 수 있다.

더 나은 상품,더 나은 가치를 제공하는 기업이 있다면 간단히 관계를 정리해버린다.

혁신의 성과는 반드시 일하는 방법의 변화로 나오게 마련이고,일하는 방법을 매뉴얼로 정리해 놓으면 혁신에 보다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

양승현 기자 yangs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