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 사이에는 '아무리 위대한 시인이라도 첫시집을 능가하는 시집을 내는 이는 없다'는 말이 있다.
첫시집은 그들이 체험하고 닦아온 삶의 핵심을 혼신의 힘으로 농축해낸 결과이기 때문이다.
시집 전문 출판사 천년의시작이 '시작시인선' 100호 시집 ≪시가 오셨다≫를 내놓은 것은 이런 점에서 의미가 깊다.
2002년부터 나오기 시작한 '시작시인선'의 70% 이상이 첫 시집이기 때문이다.
100호 시집 ≪시가 오셨다≫는 그간 이 총서를 통해 시집을 낸 시인 전원(93명)이 보내온 자선 대표시를 묶은 것이다.
18일 서울 합정동 출판사 사무실에서 만난 김태석 천년의시작 대표(사진)는 척박한 출판풍토에서 6년여 만에 100호 시집을 내기까지의 우여곡절을 담담하게 풀어냈다.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나와 14년 동안 편집기획 일을 해오던 그는 2002년 통장에 있던 돈 100만원을 털어 출판사를 시작했다.
그렇게 나온 것이 젊은 시인 61명의 합동시집 ≪즐거운 시작≫이다.
이후 기성시인들보다는 젊은 시인들의 첫시집을 위한 출판사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문단의 열렬한 호응을 얻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시집 출판은 돈이 안되거든요. 자금 압박을 받자 할 수 없이 아내를 설득해 어렵게 당첨된 아파트 분양권을 팔아 시집 출판에 쏟아부었습니다. 2006년 초에도 자금난으로 존폐의 기로에 서게 됐어요. 이때는 20명의 시인과 평론가가 1000만원씩 2억원을 마련해 출판사를 주식회사로 전환하면서 기사회생했습니다."
검증되지 않은 신인을 뽑다보니 편집위원들 간의 토론도 어느 출판사보다 치열했다.
가장 논란이 많았던 것은 정병근씨의 시집 ≪오래전에 죽은 적이 있다≫. 작품이 좋다는 것 말고는 눈에 띄는 게 없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소규모 잡지로 등단한 데다 시인의 나이도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편집위원들의 만장일치일 때만 시집으로 낼 수 있는데 유독 한명이 반대했어요. 그 편집위원을 설득하느라 진땀 뺐죠."
어렵게 햇볕을 본 이 시집은 문단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정씨는 두번째 시집을 시집명문출판사 '문학과지성사'에서 낼 수 있게 됐다.
정씨 외에도 박진성,조연호,김이듬 등 '시작시인선'을 통해 주목을 받은 시인들이 적지 않다.
김 대표는 100호 출간을 기점으로 새로운 계획을 갖고 있다.
해마다 20종 가까이 펴내던 발간 종수를 12편 정도로 줄이고,시집의 절반 정도는 중견 시인들의 작품으로 채울 작정이다.
"기성 시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출간에서 제외한다면 다양한 시를 독자들에게 소개한다는 취지에서 어긋난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래도 최소한 절반은 젊은 시인들에게 기회를 줄 방침입니다."
박신영 기자 n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