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代를 잇는 家嶪] (12)송림제화 ‥ 허영도도 '송림 수제화'로 남극탐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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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하철 2호선 을지로3가역에서 청계천으로 이어지는 골목길.
'수제화의 명문'이란 간판이 붙은 건물에 들어서자 등산화 신사화 숙녀화 골프화 등이 가지런히 진열된 10여평 규모의 매장이 한 눈에 들어왔다.
매장은 몰려든 손님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소문 듣고 찾아왔다"는 한 중년 신사에게 이덕해 사장(56)이 다가갔다. 이 사장은 다양한 디자인의 신사화를 소개한 뒤 익숙한 솜씨로 발 크기를 쟀다.
"크기는 물론 디자인도 원하는 대로 만들어 드린다"고 이 사장이 설명하자, 중년 신사는 "신발 앞쪽을 넉넉하게 해달라"고 주문했다.
이 사장은 "사람의 얼굴이 서로 다르듯이 발 모양도 천차만별"이라며 "내 발에 딱 맞는 수제화의 매력에 빠진 고객은 마치 '마약'을 찾듯이 정기적으로 구두를 사러온다"고 말했다.
72년 역사를 자랑하는 송림제화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수제화 제작업체다.
20~30년 경력의 기능공 6명이 만들어내는 물량은 연간 4000켤레 수준.발 크기를 재는 것에서부터 가죽을 꿰매고,밑창을 붙이는 데 이르기까지 전 공정을 수작업으로 하는 탓에 한 켤레 만드는 데 4~7일 정도 걸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가격(등산화 20만~30만원,신사화 17만~25만원)은 유명 브랜드를 단 기성화에 비해 그리 비싸지 않다.
이 사장은 "인건비 비중이 높아 별로 남는 게 없다"면서도 "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수제화를 신을 수 있도록 가격 인상은 최소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송림제화의 역사는 193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19세 청년이었던 창업주 이귀석 전 사장(1996년 작고)은 "먹는 사업과 입는 사업은 절대 망하지 않는다"는 부친의 조언을 듣고 '냄새 나는' 신발을 평생의 직업으로 선택한다.
그의 첫 직장은 서울의 6개 구두가게 중 하나인 '상동양화점'이었다.
점원으로 일하며 어깨너머로 기술을 익힌 이 전 사장은 3년 뒤인 1936년 독립했다.
"늘 푸른 소나무 수풀처럼 평생 신을 수 있는 구두를 만들자"는 각오로 현재 위치에 '송림(松林)화점'을 세운 것.송림의 구두는 '튼튼하다'는 입소문을 타고 인기를 끌었다.
1963년부터는 쇠징을 박아 만들던 밑창을 고무로 바꾼 등산화를 선보여 '대박'을 터뜨렸다.
가벼운 데다 미끄럼도 방지해주는 등산화가 나왔다는 소식에 등산 마니아들은 '계'를 만들어 구입할 정도로 열광했다.
하지만 1970년대 후반 들어 유명 브랜드의 기성화가 등장하면서 송림제화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상대적으로 싸고 세련된 '기계화' 앞에 수제화는 설 땅을 잃을 것이란 전망이 흘러나왔다.
"송림도 수제화를 접고 대량 생산에 나서라"는 조언이 쏟아졌지만 이 전 사장은 "발이 불편한 사람들을 위해 누군가는 수제화를 계속 만들어야 한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런 그를 두고 주변에선 "돈 벌 기회를 스스로 차버리는 바보"라고 수근댔다.
사업 확장을 포기하는 대신 이 전 사장은 기술 개발에 매달렸다.
겨울철 동상을 막아주는 등산화를 만들기 위해 가죽에 파라핀 등 4개 약품을 배합해 열처리하는 방수법을 개발한 것도 이 때였다.
이기술을 적용한 등산화 덕분에 송림제화는 기계화의 거센 공격을 이겨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김영삼 전 대통령,조순 전 서울시장,산악인 허영호씨 등 유명 인사들도 차례차례 송림의 고객이 됐다.
송림제화의 30년 고객이라는 허영호씨는 "신발에 발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발에 신발을 맞추는 방식이어서 마치 신체의 일부인 것처럼 느껴지는 게 송림 신발의 장점"이라며 "송림제화가 없었다면 남극점 도보 탐험 같은 극한 도전을 수행하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무역회사를 거쳐 등산용품 전문점을 운영하던 석사 출신의 막내 아들은 1986년 송림제화에 합류했다.
하나뿐인 형이 미국에서 의사로 활동하고 있어 아버지의 부름을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고 이 사장은 설명했다.
하지만 '신발쟁이 부자(父子)'의 호흡은 1996년 아버지의 죽음으로 10년을 넘기지 못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돈이 아닌 고객들이 보낸 100여통의 '감사 편지'를 유산으로 남겼다.
"편지를 보낸 사람들을 실망시켜선 안 된다"는 유언과 함께.
"편지를 읽으면서 고객의 발에 딱 들어맞는 신발을 만든다는 것이 의사들이 의술을 펼치는 것과 결코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아버지에게 부끄럽지 않은 신발쟁이가 되겠다고 다짐한 것도 이때부터였지요."
가업을 물려받은 이 사장은 새로운 영업방식으로 틈새 시장을 뚫는 데 주력했다.
직접 손님을 찾아가 발 모양을 뜬 뒤 완성된 신발을 추후에 택배로 보내주는 '찾아가는 서비스'가 대표적인 예다.
외환위기 극복의 일등공신이 된 이 서비스 덕분에 송림제화는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매제인 기우천씨(54)를 통해 강남점도 냈다.
송림제화는 2006년 하반기 이 사장의 외아들인 이동주씨가 정식 합류하면서 3대를 이어 '100년 가업'에 도전할 수 있게 됐다.
"웰빙 시대가 온 만큼 발 건강에 좋은 수제화에 대한 수요는 더욱 늘어날 겁니다.
아들 놈이 사업을 물려받을 때가 되면 송림제화의 사세와 명성도 더욱 높아질 것으로 믿습니다."
오상헌 기자 ohyeah@hankyung.com
'수제화의 명문'이란 간판이 붙은 건물에 들어서자 등산화 신사화 숙녀화 골프화 등이 가지런히 진열된 10여평 규모의 매장이 한 눈에 들어왔다.
매장은 몰려든 손님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소문 듣고 찾아왔다"는 한 중년 신사에게 이덕해 사장(56)이 다가갔다. 이 사장은 다양한 디자인의 신사화를 소개한 뒤 익숙한 솜씨로 발 크기를 쟀다.
"크기는 물론 디자인도 원하는 대로 만들어 드린다"고 이 사장이 설명하자, 중년 신사는 "신발 앞쪽을 넉넉하게 해달라"고 주문했다.
이 사장은 "사람의 얼굴이 서로 다르듯이 발 모양도 천차만별"이라며 "내 발에 딱 맞는 수제화의 매력에 빠진 고객은 마치 '마약'을 찾듯이 정기적으로 구두를 사러온다"고 말했다.
72년 역사를 자랑하는 송림제화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수제화 제작업체다.
20~30년 경력의 기능공 6명이 만들어내는 물량은 연간 4000켤레 수준.발 크기를 재는 것에서부터 가죽을 꿰매고,밑창을 붙이는 데 이르기까지 전 공정을 수작업으로 하는 탓에 한 켤레 만드는 데 4~7일 정도 걸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가격(등산화 20만~30만원,신사화 17만~25만원)은 유명 브랜드를 단 기성화에 비해 그리 비싸지 않다.
이 사장은 "인건비 비중이 높아 별로 남는 게 없다"면서도 "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수제화를 신을 수 있도록 가격 인상은 최소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송림제화의 역사는 193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19세 청년이었던 창업주 이귀석 전 사장(1996년 작고)은 "먹는 사업과 입는 사업은 절대 망하지 않는다"는 부친의 조언을 듣고 '냄새 나는' 신발을 평생의 직업으로 선택한다.
그의 첫 직장은 서울의 6개 구두가게 중 하나인 '상동양화점'이었다.
점원으로 일하며 어깨너머로 기술을 익힌 이 전 사장은 3년 뒤인 1936년 독립했다.
"늘 푸른 소나무 수풀처럼 평생 신을 수 있는 구두를 만들자"는 각오로 현재 위치에 '송림(松林)화점'을 세운 것.송림의 구두는 '튼튼하다'는 입소문을 타고 인기를 끌었다.
1963년부터는 쇠징을 박아 만들던 밑창을 고무로 바꾼 등산화를 선보여 '대박'을 터뜨렸다.
가벼운 데다 미끄럼도 방지해주는 등산화가 나왔다는 소식에 등산 마니아들은 '계'를 만들어 구입할 정도로 열광했다.
하지만 1970년대 후반 들어 유명 브랜드의 기성화가 등장하면서 송림제화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상대적으로 싸고 세련된 '기계화' 앞에 수제화는 설 땅을 잃을 것이란 전망이 흘러나왔다.
"송림도 수제화를 접고 대량 생산에 나서라"는 조언이 쏟아졌지만 이 전 사장은 "발이 불편한 사람들을 위해 누군가는 수제화를 계속 만들어야 한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런 그를 두고 주변에선 "돈 벌 기회를 스스로 차버리는 바보"라고 수근댔다.
사업 확장을 포기하는 대신 이 전 사장은 기술 개발에 매달렸다.
겨울철 동상을 막아주는 등산화를 만들기 위해 가죽에 파라핀 등 4개 약품을 배합해 열처리하는 방수법을 개발한 것도 이 때였다.
이기술을 적용한 등산화 덕분에 송림제화는 기계화의 거센 공격을 이겨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김영삼 전 대통령,조순 전 서울시장,산악인 허영호씨 등 유명 인사들도 차례차례 송림의 고객이 됐다.
송림제화의 30년 고객이라는 허영호씨는 "신발에 발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발에 신발을 맞추는 방식이어서 마치 신체의 일부인 것처럼 느껴지는 게 송림 신발의 장점"이라며 "송림제화가 없었다면 남극점 도보 탐험 같은 극한 도전을 수행하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무역회사를 거쳐 등산용품 전문점을 운영하던 석사 출신의 막내 아들은 1986년 송림제화에 합류했다.
하나뿐인 형이 미국에서 의사로 활동하고 있어 아버지의 부름을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고 이 사장은 설명했다.
하지만 '신발쟁이 부자(父子)'의 호흡은 1996년 아버지의 죽음으로 10년을 넘기지 못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돈이 아닌 고객들이 보낸 100여통의 '감사 편지'를 유산으로 남겼다.
"편지를 보낸 사람들을 실망시켜선 안 된다"는 유언과 함께.
"편지를 읽으면서 고객의 발에 딱 들어맞는 신발을 만든다는 것이 의사들이 의술을 펼치는 것과 결코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아버지에게 부끄럽지 않은 신발쟁이가 되겠다고 다짐한 것도 이때부터였지요."
가업을 물려받은 이 사장은 새로운 영업방식으로 틈새 시장을 뚫는 데 주력했다.
직접 손님을 찾아가 발 모양을 뜬 뒤 완성된 신발을 추후에 택배로 보내주는 '찾아가는 서비스'가 대표적인 예다.
외환위기 극복의 일등공신이 된 이 서비스 덕분에 송림제화는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매제인 기우천씨(54)를 통해 강남점도 냈다.
송림제화는 2006년 하반기 이 사장의 외아들인 이동주씨가 정식 합류하면서 3대를 이어 '100년 가업'에 도전할 수 있게 됐다.
"웰빙 시대가 온 만큼 발 건강에 좋은 수제화에 대한 수요는 더욱 늘어날 겁니다.
아들 놈이 사업을 물려받을 때가 되면 송림제화의 사세와 명성도 더욱 높아질 것으로 믿습니다."
오상헌 기자 oh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