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代를 잇는 家嶪] (8)자산유리 ‥ "유리에 베인 숱한 흉터가 훈장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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火魔도 부도도 씻어낸 '보오미거울'
"웬만한 사람들은 매일 보오미거울을 보고 잠에서 깨고 보오미거울을 보고 잠든다고 봐야죠…. 집집마다 욕실과 거실에 보오미거울 한두 장쯤은 걸려 있거든요.
" 이용덕 자산유리 대표(64)는 화재로 인한 공장 전소와 외환위기 때 부도로 맞은 두 차례의 큰 위기를 극복하고 국내 최대 거울 업체로 키운 '오뚜기형' 기업인이다.
약 300억원으로 추정되는 국내 거울시장에서의 점유율은 45%로 중국산(38%)보다 높다.
44년째 거울 만드는 일을 해오면서 유리에 베인 바람에 이 대표의 손등은 온갖 흉터로 얼룩져 있다.
이 대표의 장인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 대표는 "선친께서 빗물이 새는 옴팡간(부엌과 방 1개만 있는 아주 작은 초라한 집)에서 시작한 가업을 중단할 수 없어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자산유리는 최근 고층빌딩 신축으로 수요가 늘고 있는 건물 외장용 복층유리(700도의 온도에서 불에 구운 강화유리 2장을 붙여 만든 유리) 사업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이 회사의 복층유리 제조기술과 품질은 미국 복층유리협회(IGCC)로부터 인정받을 정도로 세계적인 수준이다.
이용덕 대표는 "창업 당시 '근근이 먹고 사는 정도'의 구멍가게였는데 올해 매출 350억원을 바라보는 중견기업이 됐다"고 말했다. 이제는 큰아들 이경수 상무(33)가 3대째 가업을 잇기 위해 '거울 인생'을 살고 있다.
◆검게 변하지 않는 거울,첫 KS인증
평남 순천의 작은 마을인 자산부락이 고향인 이붕규 창업주(1980년 작고)는 해방되던 1945년 남쪽으로 내려왔다. 이후 공주 아산 등지의 어업협회에서 수산물 장부를 기록하는 일을 하다 1959년 서울 불광동에서 남의 집 처마 밑에 '자산유리점'이란 간판을 내건 게 자산유리의 태동이다. 이때는 도매가게에서 유리를 사와 목창(나무틀로 만든 창)의 깨진 유리를 끼워주거나 거울을 사다가 팔았다. 당시 중학생이던 이 대표는 학교에 갔다온 뒤 청소와 배달을 도맡아 했다.
이 대표가 아버지의 사업을 도맡아 하기 시작한 때는 군에서 제대했던 1971년. 깨진 유리를 갈아주는 것만으로는 돈벌이가 안되자 이 대표는 때마침 매물로 나온 제경소를 1975년 인수해 거울제작을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거울은 몇개월 지나면 검게 변해 품질면에서 형편없었다. 거울은 유리판에 은을 입힌 후 광명단(납이 함유된 유약) 송진 구리 휘발유 돌가루 등을 섞어 칠했는데 칠이 산화하면서 거울을 검게 만들었던 것.
이 대표는 페인트 회사에 다니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 특수도료를 1년 만에 개발해 이 같은 현상을 없앴다. 이렇게 만든 거울에 '보오미거울' 브랜드를 붙였다. 회사는 1978년부터 3년 동안 대한주택공사에서 지은 아파트에 이 거울을 독점 공급하면서 국내 거울시장의 강자가 됐다. 이 대표는 "당시 건설현장 소장들이 보오미거울로 시공해야 한다며 찾아올 정도였다"고 소개했다. 보오미거울은 1985년 공업진흥청(당시)으로부터 국내 거울제품 중 최초로 KS인증을 받았다.
보오미거울의 품질이 알려지면서 이 회사는 1990년부터 1995년까지 아프가니스탄에 거울을 매달 1컨테이너(약 2만달러)씩 수출하기도 했다. 이 대표는 "컨테이너는 다시 가져올 필요가 없는 폐기 직전의 낡은 것을 이용했다"고 말했다.
◆화재와 부도를 딛고 일어선 오뚜기
자산유리의 노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파주공장의 설비를 증설하는 등 한참 잘나가던 1990년 1월3일 화재로 공장이 잿더미로 변했다. 이 대표는 "폐허가 된 공장을 봤을 때 맥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고 회고했다. 직원들과 불에 탄 기계를 걸레로 닦고 기름칠을 하고 못쓰게 된 부품은 청계천에서 사와 응급복구를 했다. 지붕은 덮개가 없어 뚫려 있었고 바닥은 타고 남은 재로 새까만 데다 물기가 흥건했던 악조건 속에서 거울을 만들었다. 이 대표는 "복구에 족히 1년은 걸린다는 주위 사람들의 우려와 달리 보름 만에 재가동했다"고 말했다.
두 번째 고비는 1998년 1월30일에 찾아왔다. 1997년 50억원을 투자해 설비를 갖추고 생산한 강화유리를 건설사에 납품한 뒤 30억원짜리 어음을 받았다. 그런데 건설사의 부도로 어음이 휴지조각이 되면서 회사도 부도를 면할 수 없었다. 이 대표는 부도난 날 아내에게 "애들을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속옷 몇 벌을 주섬주섬 싸가지고 회사로 들어가 재기에 나섰다. 그해 6월 화의인가를 받은 지 3년여 만인 2001년 7월 법원으로부터 화의종결을 받았다. 이 대표는 "부도났을 때 '가난을 대물림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괴로웠다"고 털어놨다.
자산유리는 이런 역경을 딛고 세계 최초로 김서림 방지거울인 '크롬거울'과 국내 처음으로 구리와 납이 함유되지 않은 거울을 내놓는 등 끊임없는 기술개발로 거울 기술을 선도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특히 복층유리 사업 확장을 위해 2005년 35억원,지난해 30억원 등 모두 65억원을 설비 증설에 투입했다. '솔라론'(solaron) 브랜드의 복층유리는 국내 초고층 아파트 및 주상복합 건물에 설치될 정도로 성과를 내고 있다. 이 대표는 "2010년 캐나다 밴쿠버에서 열리는 동계올림픽 선수촌아파트에도 자산유리 복층유리가 설치된다"고 강조했다.
이계주 기자 leer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