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길진 칼럼] 영혼의 탯줄을 잘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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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은 조각(彫刻)과 같다. 조각은 불필요한 부분을 깎아 낸다. 내면에 가지고 있는 자질을 드러내는 것이 교육이다. 이미 영혼은 완전하다고 믿음이 전제되어야한다. 일찌감치 시작한 교육이 제자리를 잡지 못하는 까닭은 아이의 끼가 발휘되지 못한 채, 획일적 지식만 덧붙이는 복재 이식 탓이 크다.
잠재된 능력을 작동시키는 극단적인 예가 유태인이다.
잘나간다는 유태인들도 2-3살 어린아이들 사랑스럽게 안아주다가 갑자기 바닥에 툭하고 떨어뜨린다. 물론 아이는 자지러지게 놀라며 운다. 아프기도 하겠지만 자기를 내동댕이친 부모에 대한 배신감에 더욱 서러울 것이다. 왜 부모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이를 몰인정하게 내던지는 것일까.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다.’
이것을 아이가 느끼게 하기 위해서다. 그러면서 아이는 세상이 부모조차도 믿을 수 없으니 나 혼자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절박한 생존본능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마치 어미 사자가 새끼를 절벽 아래로 굴려 올라오게 하는 바와 다르지 않다. 한국전쟁의 기아와 보리 고개를 경험한 지금의 50-60대가 우리 경제 성장의 엔진이었다는 사실을 되돌아봐도 쉽게 수긍이 간다.
물론 나라 없이 위태로운 수천 년을 지낸 유태인의 처절한 생존 본능 교육이기에 새겨들어야 하지만 잠재된 생존본능이라는 최대의 에너지를 아이 스스로 일깨우게 하는 핵심은 절대로 놓치면 안 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의 상류층 자재들이 만들었다는 소위 ‘황태자 클럽’은 여러모로 한탄을 자아낸다.
생존 경험이 어린아이에게 너무 가혹하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지 몰라도 과거 전쟁 통엔 10살 꼬마가 5살 아리를 업고 키웠다. 조선시대에는 15살 전후에 결혼하여 처자를 거느리고 가정을 꾸렸다. 어린 가장은 일찍 조숙해진다. 인간은 얼마든지 내재된 힘이 있다는 증거다. 재테크 조기교육의 시작은 지식도 아니고 금융상품도 아니고 어학도 아닌 바로 내재된 ‘생존 경험’이다.
생존 경험을 일깨우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부모는 과감하게 자식의 영혼의 탯줄을 끊어야한다.
성인이 되어도 부모에게 경제적 의존을 하고 있는 젊은 청년들을 캥거루족이 늘고 있다. 이 문제는 하루아침에 생긴 문제가 아니다. 부모의 수혈만 받아온 품안의 교육이 차곡차곡 쌓인 것이다. 이런 청년들이 늘고 있는 것도 문제지만 자식이 고생할까봐 이를 지원해주고 있는 부모도 문제다.
아기는 어머니 뱃속에서 열 달 동안 탯줄로 영양을 공급받는다. 그러나 아무리 생명줄이라도 일단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면 탯줄을 끊어줘야 한다. 자식이 성장해 20세가 되면 또 하나의 탯줄, 영혼의 탯줄을 잘라야 한다. 아무리 귀한 자식이라도 때가 되어 탯줄을 냉정하게 자르지 않으면 부모와 아이가 둘 다 죽는다. 영혼의 탯줄을 또한 마찬가지다. 자식은 성인이 되어서도 자식이 영혼의 탯줄을 자르지 않으면 절대 자립을 할 수 없다.
아이 스스로 영혼의 탯줄을 자르고 나가는 사례는 많지 않다. 부모의 결단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부모가 좋은 대학에 보내기위해, 대학졸업하면 다시 유학이나 좋은 직장을 위해, 결혼을 위해 발 벗고 나선다. 자기 몸집보다 큰 캥거루를 품는 꼴이다. 부모로서 이를 도리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넘침은 오리려 부족 하니만 못하다.
미국에서 있었던 실화다. 뉴욕의 한 사찰에서는 석가탄신일마다 허드슨 강에 자라를 방생했다. 그런데 한 미국 소년이 강으로 뛰어오더니 자라 한 마리를 손으로 건져 달아났다. 사찰 측은 근처에 있던 경찰을 불렀고. 경찰이 소년을 잡아 왜 자라를 빼앗아 도망 쳤냐고 묻자 소년은 대답하였습니다.
“자라는 바다에 넣어주면 죽어요. 민물자라란 말이예요.”
그 순간 방생의식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얼굴을 붉혔다. 방생은 선연의 씨앗을 맺는다는 의미로 사용되지만 방생이라는 이름하에 얼마나 많은 살생을 하고 있는가.
누군가를 위한다 할 때 위(爲)자 옆에 사람 인(人)변이 붙으면 거짓 위(僞)가 된다. 즉 인간이 누구를 위한다는 것은 다 거짓이라는 뜻. 누군가를 위해 살았다고 하지만 결국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못 참을 자신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다. 남을 도울 때, 차라리 마음속으로 그들을 돕지 않으면 못 참는 자신을 위해 이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라. 그래야 잘못된 카르마가 쌓이지 않는다.
남을 돕는다는 것은 잘못 되면 위선이 될 수 있다. 물론 부모가 자식을 위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새끼 거북이를 돕고, 방생으로 선연을 맺으려 했던 것처럼 자식을 위한다지만 자식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자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자신을 위해서 한 것이기 때문이다.
작은 경험을 통해 돈의 필요성, 성공과 실패, 삶과 행복에 대해 스스로 면역성을 키우게 예방주사를 맞아야 하는데, 적성과 까르마(업)가 다른, 즉 혈액형이 다른 부모의 피를 수혈해버린 꼴이다. 자질구레한 시행착오를 생략한 채 면역성이 없이 자란 자녀가 나중에 부모로부터 큰 유산을 물려받고 순탄한 출세코스로 고위직에 오른 후, 뒤늦게 시행착오를 겪는 대가는 가정파탄이상이며 결국 부모의 더 큰 수혈을 요구한다.
그래서 교육은 수혈이 아니라 면역이라고도 한다. 수혈은 부모가 지속적으로 해주지 않으면 자식은 위태롭다. 그래서 내부에 잠재한 면역성이 발휘되게 하는 작은 시련을 던져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조기 재테크 계명의 첫 번째는 영혼의 탯줄을 자르라는 것.
사실 이 말은 아이가 아니라 부모를 향한 것이다. 이미 아이는 생존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이를 막는 것이 부모다. 그러니 아이의 잠재력 생존 본능을 가진 부모가 독한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 핵심이다. 조기 재테크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학생이 아니라 바로 가르치는 당사자의 마음가짐일 것이다.(hooam.com)
잠재된 능력을 작동시키는 극단적인 예가 유태인이다.
잘나간다는 유태인들도 2-3살 어린아이들 사랑스럽게 안아주다가 갑자기 바닥에 툭하고 떨어뜨린다. 물론 아이는 자지러지게 놀라며 운다. 아프기도 하겠지만 자기를 내동댕이친 부모에 대한 배신감에 더욱 서러울 것이다. 왜 부모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이를 몰인정하게 내던지는 것일까.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다.’
이것을 아이가 느끼게 하기 위해서다. 그러면서 아이는 세상이 부모조차도 믿을 수 없으니 나 혼자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절박한 생존본능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마치 어미 사자가 새끼를 절벽 아래로 굴려 올라오게 하는 바와 다르지 않다. 한국전쟁의 기아와 보리 고개를 경험한 지금의 50-60대가 우리 경제 성장의 엔진이었다는 사실을 되돌아봐도 쉽게 수긍이 간다.
물론 나라 없이 위태로운 수천 년을 지낸 유태인의 처절한 생존 본능 교육이기에 새겨들어야 하지만 잠재된 생존본능이라는 최대의 에너지를 아이 스스로 일깨우게 하는 핵심은 절대로 놓치면 안 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의 상류층 자재들이 만들었다는 소위 ‘황태자 클럽’은 여러모로 한탄을 자아낸다.
생존 경험이 어린아이에게 너무 가혹하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지 몰라도 과거 전쟁 통엔 10살 꼬마가 5살 아리를 업고 키웠다. 조선시대에는 15살 전후에 결혼하여 처자를 거느리고 가정을 꾸렸다. 어린 가장은 일찍 조숙해진다. 인간은 얼마든지 내재된 힘이 있다는 증거다. 재테크 조기교육의 시작은 지식도 아니고 금융상품도 아니고 어학도 아닌 바로 내재된 ‘생존 경험’이다.
생존 경험을 일깨우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부모는 과감하게 자식의 영혼의 탯줄을 끊어야한다.
성인이 되어도 부모에게 경제적 의존을 하고 있는 젊은 청년들을 캥거루족이 늘고 있다. 이 문제는 하루아침에 생긴 문제가 아니다. 부모의 수혈만 받아온 품안의 교육이 차곡차곡 쌓인 것이다. 이런 청년들이 늘고 있는 것도 문제지만 자식이 고생할까봐 이를 지원해주고 있는 부모도 문제다.
아기는 어머니 뱃속에서 열 달 동안 탯줄로 영양을 공급받는다. 그러나 아무리 생명줄이라도 일단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면 탯줄을 끊어줘야 한다. 자식이 성장해 20세가 되면 또 하나의 탯줄, 영혼의 탯줄을 잘라야 한다. 아무리 귀한 자식이라도 때가 되어 탯줄을 냉정하게 자르지 않으면 부모와 아이가 둘 다 죽는다. 영혼의 탯줄을 또한 마찬가지다. 자식은 성인이 되어서도 자식이 영혼의 탯줄을 자르지 않으면 절대 자립을 할 수 없다.
아이 스스로 영혼의 탯줄을 자르고 나가는 사례는 많지 않다. 부모의 결단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부모가 좋은 대학에 보내기위해, 대학졸업하면 다시 유학이나 좋은 직장을 위해, 결혼을 위해 발 벗고 나선다. 자기 몸집보다 큰 캥거루를 품는 꼴이다. 부모로서 이를 도리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넘침은 오리려 부족 하니만 못하다.
미국에서 있었던 실화다. 뉴욕의 한 사찰에서는 석가탄신일마다 허드슨 강에 자라를 방생했다. 그런데 한 미국 소년이 강으로 뛰어오더니 자라 한 마리를 손으로 건져 달아났다. 사찰 측은 근처에 있던 경찰을 불렀고. 경찰이 소년을 잡아 왜 자라를 빼앗아 도망 쳤냐고 묻자 소년은 대답하였습니다.
“자라는 바다에 넣어주면 죽어요. 민물자라란 말이예요.”
그 순간 방생의식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얼굴을 붉혔다. 방생은 선연의 씨앗을 맺는다는 의미로 사용되지만 방생이라는 이름하에 얼마나 많은 살생을 하고 있는가.
누군가를 위한다 할 때 위(爲)자 옆에 사람 인(人)변이 붙으면 거짓 위(僞)가 된다. 즉 인간이 누구를 위한다는 것은 다 거짓이라는 뜻. 누군가를 위해 살았다고 하지만 결국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못 참을 자신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다. 남을 도울 때, 차라리 마음속으로 그들을 돕지 않으면 못 참는 자신을 위해 이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라. 그래야 잘못된 카르마가 쌓이지 않는다.
남을 돕는다는 것은 잘못 되면 위선이 될 수 있다. 물론 부모가 자식을 위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새끼 거북이를 돕고, 방생으로 선연을 맺으려 했던 것처럼 자식을 위한다지만 자식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자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자신을 위해서 한 것이기 때문이다.
작은 경험을 통해 돈의 필요성, 성공과 실패, 삶과 행복에 대해 스스로 면역성을 키우게 예방주사를 맞아야 하는데, 적성과 까르마(업)가 다른, 즉 혈액형이 다른 부모의 피를 수혈해버린 꼴이다. 자질구레한 시행착오를 생략한 채 면역성이 없이 자란 자녀가 나중에 부모로부터 큰 유산을 물려받고 순탄한 출세코스로 고위직에 오른 후, 뒤늦게 시행착오를 겪는 대가는 가정파탄이상이며 결국 부모의 더 큰 수혈을 요구한다.
그래서 교육은 수혈이 아니라 면역이라고도 한다. 수혈은 부모가 지속적으로 해주지 않으면 자식은 위태롭다. 그래서 내부에 잠재한 면역성이 발휘되게 하는 작은 시련을 던져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조기 재테크 계명의 첫 번째는 영혼의 탯줄을 자르라는 것.
사실 이 말은 아이가 아니라 부모를 향한 것이다. 이미 아이는 생존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이를 막는 것이 부모다. 그러니 아이의 잠재력 생존 본능을 가진 부모가 독한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 핵심이다. 조기 재테크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학생이 아니라 바로 가르치는 당사자의 마음가짐일 것이다.(hooa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