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있는 갤러리] 김남극 '산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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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게를 진 아저씨가 오토바이를 타고 담배를 물고 뽀로롱 마가리로 사라진다
오토바이를 타고 피울 수 있는 담배는
장미밖에 없다
챙이 넓은 모자에 수건을 동치고 세레스 적재함에 올라앉은 아주머니가
뭘 오물거리며 실려간다
세레스 적재함에서 먹을 수 있는 건
찰강냉이밖에 없다
JD트랙터 해가림 천막 속에서 버클리대 모자를 쓴 친구가 밭가에 트랙터를 세우고 커피를 마신다 밭가에서 마실 수 있는 건 정다방에서 배달된 커피밖에 없다
친구 몇이 솔모종거리에 모여 장미 담배를 물고 찰강냉이를 물어뜯으며 정다방 정양을 기다린다
-김남극 '산협(山峽)'전문
'산협'은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 이효석이 쓴 소설 제목이기도 하다.
그 배경이 현대로,형식은 시로 바뀌었다.식민지 시대 궁핍하고 적막하던 산골마을에도 '문명'이 찾아들었다.
마가리로 오토바이가 달려가고 트랙터를 밭가에 세워놓은 후 커피를 주문해 먹는다.심지어 버클리대 모자까지 들어왔다.하지만 달라지지 않은 게 있다.
예나 지금이나 지루하다는 것.
변함 없는 풍경에 늘 마주치는 얼굴,별 볼일 없는 일상.그래서 시간이 더디게 흐른다.앞으로도 별로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도저히 못 살 곳이라고 예단하지 말라.
행복은 대개 무사무변의 지루함으로 구성돼 있으니까.
지루함이 깨지면서 불행이 오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이런 산협 생활이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이정환 문화부장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