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도 세계적인 투자은행(IB)에 투자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홍석주 한국투자공사(KIC) 사장은 최근 기자들에게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아시아 국부펀드들에는 또 다른 기회가 될 수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누구나 투자하고 싶어하는 세계적 IB의 덩어리 지분을 인수한다는 것 자체가 평소 같으면 사실상 불가능한 데다,인수한다 하더라도 주가가 높아 대규모 자금을 퍼부어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번 사태 이후 메릴린치의 적극적인 투자 유치로 싱가포르의 정부 투자기관인 테마섹은 50억달러를 투자해 최대주주가 됐다.

KIC도 2년9개월 이후에는 순수 재무적 투자자들을 제외하면 2대주주로 올라선다.

아시아 국부펀드들이 사실상 메릴린치의 주인이 되는 셈이다.주당 90달러가 넘던 주가도 지금은 50달러 수준에 불과하다.

전문가들은 KIC의 이번 투자가 보수적 투자 패턴에서 벗어나 공격적인 투자에 나서는 계기가 될 것으로 평가했다.

◆왜 투자했나

무엇보다 장사가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KIC는 그동안 철저히 안전성 위주로 자금을 운용해왔는데,그렇다 보니 지금까지 투자한 148억달러의 자금이 거의 모두 선진국 채권에 들어가는 편중 현상을 보였다.

일부 자금이 주식에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역시 선진국 주식이었고 그나마 인덱스 펀드 형태로 운용됐다.

위험하기는 하지만 상대적으로 높은 수익을 낼 수 있는 신흥시장(이머징마켓)은 투자 대상에서 빠져 있었다.

'원금 보호'를 최우선 과제로 삼아 운용해온 셈이다.

이런 방식으로 운용하면 갑자기 거액의 돈을 잃을 염려는 적지만 투자 수익률이 낮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KIC의 지난해 투자수익률은 연 7%대 초반에 그쳤다.

이는 외국의 국부펀드가 공격적인 투자로 높은 수익률을 올린 것과 대조적이다.

예컨대 싱가포르 정부 투자기관인 테마섹은 최근 수년간 연평균 17%의 수익률을 낸 것으로 알려졌다.

◆현 주가보다 낮은 수준

KIC가 이번에 인수하는 메릴린치 주식은 의무전환 우선주로 연 9%의 배당을 받는 조건이다.

2년9개월이 지나는 시점에서 보통주로 전환된다.보통주 전환가격은 주당 52.4달러 정도다.

지난 14일 메릴린치 주가(55.97달러)보다 낮은 수준인 데다 서브프라임 사태가 해결될 경우 주가가 올라 큰 이익을 볼 수 있을 것으로 KIC는 기대하고 있다.

KIC는 또 우선주가 보통주로 전환될 경우 메릴린치 지분 3.1%가량을 확보,5대주주로 올라선다.

펀드 투자자를 제외하면 테마섹에 이어 2대주주다.KIC 관계자는 "외환위기 때는 우리가 자금이 부족해 글로벌 투자은행에 매달렸지만 지금은 상황이 역전됐다"고 말했다.

재경부 고위 관계자는 "KIC의 투자 대상을 확대하는 차원에서 이번 투자를 결정했다"며 "한국이 세계적 금융위기를 완화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입장에서도 세계적 투자은행의 글로벌 금융 노하우를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공격적 투자 계속되나

KIC는 앞으로도 투자 패턴 변화에 적극적인 행보를 보일 가능성이 높다.

자금 사정에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당초 KIC에 위탁된 자금은 200억달러였다.이 중 148억달러는 이미 투자가 끝났고 나머지 52억달러는 올 상반기에 투자가 예정돼 있다.

하지만 재경부가 작년 말 100억달러의 자산을 KIC에 추가로 위탁하기로 하면서 KIC의 주머니 사정이 넉넉해졌다.

이번에 메릴린치에 투자하는 20억달러도 재경부가 추가 위탁키로 한 자금의 일부다.

KIC는 메릴린치에 투자하고 나서도 80억달러 정도를 더 투자할 여력이 있는 셈이다.

KIC 관계자는 "여유 자금은 대체 투자 등에 집중할 계획이지만 기회가 되면 이번 건과 유사한 투자도 계속 검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주용석 기자 hoho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