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이후 올 상반기까지 국내 금융시장은 은행의 독무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은행 회생을 위기 극복의 최대 선결 과제로 여긴 정부는 87조원이란 천문학적인 돈을 공적자금 명목으로 은행에다 투입했다.

외환위기에다 신용카드 사태까지 겹쳐 가계와 기업의 안전자산 선호현상이 극에 달했다.

예금금리가 연 4% 아래로 떨어져도 뭉칫돈이 은행으로 굴러 들어왔다.

대출은 주택이나 중소기업 부동산을 담보로 잡고 내줬으니 그야말로 '땅 짚고 헤엄치기' 장사였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180도 바뀌었다.

연 4∼5% 금리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고객들이 자금을 증권업계의 펀드나 자산관리계좌(CMA)로 옮기기 시작했다.

은행들이 앉아서 장사할 때 증권업계는 각종 신상품을 만들며 뛰었다.

보험업계도 조만간 이뤄질 보험업법 개정을 계기로 대반격을 준비하고 있다.

강정원 국민은행장이 "고난이도의 은행 경영은 이제부터"라고 말한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은행, 파티는 끝났다] (下) 금융권 무한경쟁 시대 <끝> … 증권·보험과 생존싸움

◆정부 과보호가 무사안일 키워

외환위기 이후 정부가 '은행 살리기'를 위해 한 조치는 공적자금 투입과 은행 간 짝짓기(M&A)에 머무르지 않는다.

은행의 수익 기반을 다져주기 위해 은행이 다른 금융권 문턱을 넘도록 해 줬다.

대표적인 사례가 펀드와 방카슈랑스 판매 허용.은행의 펀드 판매는 2000년부터,방카슈랑스 판매는 2003년부터 이뤄졌다.

이 같은 정책은 금융권 균형발전 원칙을 거스르는 것이었다.

2금융권에서 요구하고 있는 지급결제 업무는 증권사의 경우 자본시장통합법(이하 자통법)이 발효되는 2009년부터 허용되며,보험사의 경우 허용 여부가 불투명하다.

또 펀드와 방카슈랑스 모두 은행이 판매 후 위험 관리를 전혀 하지 않아도 된다는 측면에서 은행의 무사안일을 키웠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실제 펀드가 손실이 나서 판매한 은행에 문의해도 자산운용사에 물어보라는 무성의한 대답밖에 들을 수가 없다.

그런데도 은행들은 펀드와 방카슈랑스 판매로 떼돈을 벌어들이고 있다.

은행들은 2005년부터 올 상반기까지 펀드 판매로 1조6700억원을 챙겼다.


◆무늬만 금융지주·구호만 IB

은행들도 '나름대로' 구조조정을 진행하고 선진 금융을 추진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은행들이 사례로 드는 것이 금융지주회사 체제와 투자은행(IB) 역량 강화다.

우리 신한 하나 등이 이미 지주회사로 전환했으며 국민은행은 전환 작업에 착수했다.

하지만 내용을 뜯어보면 지주라는 말이 머쓱할 정도로 은행 중심이다.

지주 내에서 은행의 비중은 80%를 웃돈다.

증권사 등 자회사 주요 임원은 은행 출신이 차지하고 있다.

"증권은 신속한 의사결정이 필요한데 은행 출신들은 이것저것 재느라 시간 다 보내서 같이 일 못해 먹겠다"는 증권사 실무자들의 말도 공공연하게 흘러 나온다.

IB도 지지부진하긴 마찬가지다.

단적으로 두산그룹의 보브캣(Bobcat) 인수를 위한 39억달러 협조융자 때 국민은행과 하나은행이 투입한 돈은 각각 1억달러에 불과하다.

한 증권사 기업금융 담당 임원은 "IB는 말 그대로 투자은행인데 국내 은행들은 분석 능력이 떨어지고 위험 부담 의지도 약하다 보니 기대할 게 거의 없다"고 털어놨다.

◆2금융권과 무한 경쟁은 이제부터

정신동 금융감독원 조기경보팀장은 "2009년 자통법이 시행되면 은행이 독점하던 지급결제망에 금융투자회사(증권사)의 직접 참여가 가능해져 은행권의 저원가성 수신 이탈이 심화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이에 대응해 은행이 금리를 올리거나 양도성예금증서(CD)와 은행채 등에 대한 자금 조달 의존도를 높일 경우 조달 비용이 커지면서 수익성이 나빠질 것이란 게 정 팀장을 포함한 대다수 전문가들의 전망이다.

자통법의 핵심은 금융투자회사가 예금과 보험을 제외한 모든 금융상품을 만들 수 있도록 한 것.투자 대상을 제한하지 않도록 미래에셋이 설계한 '인사이트펀드'에 4조원이 몰려든 것이 머니 무브 현상 가속화의 징후로 받여들여지고 있다.

보험업법 개정이 빅뱅 수준으로 이뤄진다면 은행에 또다른 위협이 될 것으로 관측된다.

어슈어뱅킹(보험사의 은행업 겸업) 등 보험사의 겸영 범위가 확대되면 은행과의 충돌이 불가피하다.

정부가 쳐놓은 온실에서 편안하게만 지내다가 갑작스러운 자금 이탈로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는 은행들이 더 큰 환경 변화에 어떻게 대응할지 주목된다.

박준동 기자 jdpow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