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미술 속으로] (37)창작과 교육에 힘쓴 유화가 최제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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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남 화백은 유화 분야에서 북한 화단과 학계에서 공로를 세운 인물로 꼽힌다.
최 화백은 1934년 1월12일 함경북도 온성군에서 출생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고향에서 다닌 그는 1951년 평양미술대학에 입학해 문학수와 한상익으로부터 그림을 배웠다.
1951년 모스크바 대학 장식미술학부에서 5년간 미술수업을 받고 50여점의 유화 작품으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1957년 귀국한 이후 30년간 평양미술대학에서 교원, 강좌장, 교무부학장, 과학부학장 등을 맡으며 전문가들을 양성해냈다.
이 시기에 그는 <닭(1959년)>, <아들(1961)> 등 주요 작품을 배출했다. 그의 작품은 "세부적인 부분을 과감히 생략하고 굵은 터치로 필요한 부분을 강조ㆍ부각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1970년대와 1980년대는 작품 활동보다 교육 및 행정, 대외사업에 더 열중한 시기였다.
이 기간동안 3번에 걸쳐 독일 수공예전람회 국제 심사위원을 맡았고, 국제 토론회에 대표단으로 참석하기도 했다.
1986년부터 1995년까지 새로 조직된 중앙미술창작사 사장으로 활동하면서 미술작품 창작사업을 조직, 지도했다. 이 시기에는 <폭포>, <가을>, <소백수의 아침> 등 풍경화를 주로 그렸다.
1995년 이후 송화미술원 회원으로 활동했고, 1998년 3월 조각가 곽태영과 평양국제문화회관에서 47점의 작품으로 2인 전람회를 열기도 했다.
노을 61x92cm
<자료제공: 포털아트 www.porart.com>
한경닷컴 문정현 기자
최 화백은 1934년 1월12일 함경북도 온성군에서 출생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고향에서 다닌 그는 1951년 평양미술대학에 입학해 문학수와 한상익으로부터 그림을 배웠다.
1951년 모스크바 대학 장식미술학부에서 5년간 미술수업을 받고 50여점의 유화 작품으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1957년 귀국한 이후 30년간 평양미술대학에서 교원, 강좌장, 교무부학장, 과학부학장 등을 맡으며 전문가들을 양성해냈다.
이 시기에 그는 <닭(1959년)>, <아들(1961)> 등 주요 작품을 배출했다. 그의 작품은 "세부적인 부분을 과감히 생략하고 굵은 터치로 필요한 부분을 강조ㆍ부각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1970년대와 1980년대는 작품 활동보다 교육 및 행정, 대외사업에 더 열중한 시기였다.
이 기간동안 3번에 걸쳐 독일 수공예전람회 국제 심사위원을 맡았고, 국제 토론회에 대표단으로 참석하기도 했다.
1986년부터 1995년까지 새로 조직된 중앙미술창작사 사장으로 활동하면서 미술작품 창작사업을 조직, 지도했다. 이 시기에는 <폭포>, <가을>, <소백수의 아침> 등 풍경화를 주로 그렸다.
1995년 이후 송화미술원 회원으로 활동했고, 1998년 3월 조각가 곽태영과 평양국제문화회관에서 47점의 작품으로 2인 전람회를 열기도 했다.
노을 61x92cm
<자료제공: 포털아트 www.porart.com>
한경닷컴 문정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