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원대냐,900원대냐''70달러냐,80달러냐'.

내년 사업계획을 짜느라 분주한 기업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경영의 큰 변수가 되는 원.달러 환율과 유가 전망이 쉽지 않아서다.800원대를 향해 곤두박질치는 환율이나 배럴당 100달러를 돌파할 기세로 거침없이 치솟는 국제 유가를 보면 '환율 800원대-유가 100달러 시대'를 가정한 경영 시나리오를 작성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최악의 시나리오로 사업계획을 세우기는 어렵다.당장 매출과 이익 전망치 감소가 불보듯 뻔한 데다 예측이 빗나갈 경우 환헤지(환율 리스크 회피) 전략이 차질을 빚는 것은 물론 상품 출시 계획 등 사업전략 수정도 불가피해 후유증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4대 그룹은 환율 800원대 대비

17일 재계에 따르면 삼성은 내년 경영환경이 올해보다 훨씬 어렵다고 보고 사업계획 수립을 위한 기준 환율과 유가 등 가이드라인을 보수적으로 잡았다.

삼성은 내년 원.달러 기준 환율을 925원,유가(두바이유 기준)는 67달러,금리(3년만기 회사채 기준)는 연 6%로 설정했다.올해 가이드라인은 환율 932원,유가 64달러,금리 연 5.3%였다.

현대.기아자동차는 내년 환율 예상치를 올해와 같은 900원으로 설정했다.유가는 배럴당 75달러로 작년보다 12달러 높게 내다봤고,금리는 연 6%로 지난해보다 0.5%포인트 높여 잡았다. SK그룹은 900원대 초반에서 800원대 후반까지의 환율 등락을 예상하고 탄력적인 사업계획을 짜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LG전자는 아예 내년 기준 환율을 880~900원으로 낮췄다.

삼성과 현대차가 일단 환율 900원대를 고수했지만 앞으로 한두 차례의 수정을 거쳐 800원대로 하향 조정할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수출 비중이 80%에 달하는 삼성전자는 원.달러 환율이 10원 하락하면 3000억원의 영업이익이 허공으로 날아간다.현대.기아차도 해외 판매 비중이 70%를 웃돌아 환율이 10원 떨어질 때마다 2000억원의 매출 손실을 입는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내년 초 결정되는 최종 사업계획안은 현재보다 더욱 보수적으로 잡힐 것 같다"며 "최근 2년간 일괄적인 잣대로 사업계획을 짜기보다는 시나리오별 대응전략을 수립했듯이 내년 사업계획도 최악의 경우를 상정해 여러가지 안을 마련하고 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고위 관계자도 "현재 세계 경기 흐름을 볼 때 약달러 추세는 내년까지 계속될 것 같다"며 "내년 초에는 기준환율을 900원 미만으로 잡아야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현대차 관계자는 "현 상황에서 800원대 환율을 상정하고 사업계획을 수립할 경우 내년 예상 매출과 이익이 급감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며 "그러나 환율이 계속 하락할 경우를 대비해 잠정적으로 880원대 환율 기준을 세워놓고 있다"고 말했다.

◆나머지 기업들은 "좀더 지켜본 뒤에"

4대 그룹을 제외한 나머지 기업들은 아직까지 내년 사업계획을 짤 엄두도 못 내고 있다.국제 유가와 환율 등이 연일 급등하고 있어서다.

롯데그룹은 다음 달 말께 잠정 계획을 세운 뒤 회장 보고를 거쳐 연초에 사업계획을 최종 확정할 계획이다.그룹 관계자는 "올해 기준환율이 930원,유가는 60~70달러 수준이었는데 내년에는 환율을 910원대 밑으로 잡고 유가도 높여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포스코 현대중공업 한진 두산 등은 다른 그룹이나 주요 경제연구소의 내년 경제 전망치가 발표된 다음 본격적으로 경영 계획 수립 작업에 들어간다는 방침이다.

포스코는 18일 포스코경영연구소와 환율 유가에 대해 협의한 뒤 이 지표를 기준으로 다음 달부터 내년 경영계획을 짠다.현대중공업은 삼성경제연구소 등 주요 연구소의 발표를 기다려 내용을 분석한 뒤 사업계획을 결정하기로 했다.

한진그룹도 다른 그룹의 동향을 살펴본 뒤 11월 말부터 경영계획의 밑그림을 그릴 계획이다.두산도 12월께 내년 경영계획의 윤곽이 잡힐 것으로 보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기업들이 우려하는 시나리오는 환율 800원대와 유가 100달러"라며 "주요 기업들이 연초부터 비상경영을 선포하고 원가 절감에 들어갔지만 유가 오름세와 환율 내림세가 진정되지 않을 경우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건호/이태명 기자 leek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