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이후 총 72호를 내는 동안 34회의 발행 금지와 정간 1회,벌금 1회 등을 당하면서 국내 최고의 명성을 얻었던 잡지.신문·잡지 구독자가 10만명도 되지 않는 상황에서 매월 8000~9000부를 찍어 최고의 상업적 성공을 이뤘고 최대 1만부의 발행 부수를 자랑하던 대중적 종합지.1920년 6월 창간돼 6년간 발행됐던 '개벽'이다.

현대 문학과 한국 근대사를 전공한 연구자들이 이 '개벽' 읽기에 나섰다.

발행 당시 유수한 신문의 영향력을 능가했고 지성계의 거봉으로 시사·문학·학술·사상 등 전방위적 여론을 형성했던 만큼 '개벽'이라는 창을 통해 당시 지식인들의 문제 의식과 고뇌를 읽고 당대의 문화와 사회를 조망하자는 뜻에서다.

임경석·차혜영씨 등 12명이 쓴 ''개벽'에 비친 식민지 조선의 얼굴'(모시는사람들)은 이들의 '개벽' 공동 연구 결과물이다.

이 책은 1부에서 '개벽'을 만든 주체에 착안해 지적·재정적·조직(유통)적 배경이 된 천도교와 천도교 청년당 및 천도교 청년에 주목한다.

2부에서는 '개벽'에 담긴 조선의 사회상에 천착하고 3부에서는 '개벽'과 한국 문학의 상관 관계를 다뤘다.

'개벽'은 천도교 청년회원들이 주축이 된 '개벽사'에서 발간했다.

따라서 '개벽'의 운영진은 천도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창간 동인이자 편집인과 편집주간을 각각 맡았던 이돈화,김기전은 물론 박달성,차상찬,민영순,이두성,방정환 등 20~30대 천도교 청년들이 '개벽'을 이끌었다.

조규태 한성대 교수는 천도교 청년,평안도·함경도 등 서북 출신의 지방인,서구 지향의 근대인,지일(知日) 집단의 애족인 등을 '개벽' 지도자들의 특성으로 꼽았다.

또 허수 서울대 강사는 "이돈화가 정립한 '사람성(性)주의'는 천도교 문화운동론뿐만 아니라 '개벽' 전체를 일관한 사상이었다"고 평가했다.

김정인 춘천교대 교수는 "'개벽'이 잡지계를 선도할 수 있었던 것은 거듭되는 검열의 가시밭길 속에서도 망국 조선과 조선인의 암울하고 부조리한 현실을 치열하게,때로는 풍자와 해학으로 담아내고자 했고 독립과 혁명의 미래를 전망하는 사상 논쟁을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온건 개화파의 중진이었던 김윤식의 사회장(社會葬)을 둘러싼 논쟁을 통해 사회주의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의 첫 정면 충돌을 읽어낸 임경석 성균관대 교수의 논문도 흥미롭다.

524쪽,2만5000원.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