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들의 세상 사는 이야기] 구자홍 동양투신운용 부회장 "돈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기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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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에서 기업인으로 … '原價 안들어간 인생'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과 카랑카랑한 목소리.마치 무인(武人)을 연상케 했다.
구자홍 동양투신운용 부회장(57)의 첫인상이다.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나 경제기획원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다 민간 기업으로 옮긴 구 부회장.그는 기업에서 구조조정을 많이 한 최고경영자(CEO)에 속한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구 부회장은 부드러운 CEO였다.
인간미 넘치는 솔직함이 구수한 '촌놈(?)'의 말투에 그대로 묻어나왔다.
대화를 유쾌하게 이끄는 유머와 재치도 일품이었다.
구 부회장은 인터뷰 내내 "내가 오늘 너무 발거벗는 것 아니냐"고 했다.
실제로 구 부회장은 거침없이 다 쏟아냈다.
한때 하루에 100여잔이 넘게 술을 마셨다는 구 부회장.인사동의 한 음식점에서 5시간에 걸쳐 풀어낸 그의 인생사는 한 편의 소설 같았다.
# 12살…인생의 빅딜
―공부는 잘하셨죠.
"공부요.
잘했죠.저는 원가가 안 들어간 사람이에요.
과외나 뭐 이런 거 없었죠.대학도 전액 장학금 받고 다녔어요.
서울 상대 다닐 때 등록금이 1만6000원이었죠.지금까지 저한테 들어간 돈은 아주 적어요.
원가가 안 들어간 만큼 뭘 해도 손해 볼 것 없다는 생각을 하죠."
―학비는 어떻게 버셨나요.
"원래 시골 촌놈들은 다 입주 과외를 했거든요. 집에서 애들 가르치고,용돈받아 생활했죠."
―전주에서 초♥중♥고를 졸업하셨죠.
"고향은 전북 진안입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전주로 하숙을 나왔죠.생각해 보세요.
12살짜리가 혼자 하숙을 했으니까 얼마나 불쌍해요.
그래도 꾹 참고 지냈죠."
―전주가 제2의 고향이시네요.
"그런 셈이죠.초등학교부터 전주고까지 쭉 다녔으니까요.
지금 생각해 봐도 초등학교 때 전주로 이사오길 잘 한 것 같아요.
그때 계속 시골에 있었으면 농사짓고 있었겠죠.그것도 좋긴 하지만,지금 같은 기회는 없었을 겁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인생의 빅딜'을 한 셈이죠."
# 아! 마누라
―이성한테 인기가 많으셨을 것 같은데 연애결혼 하셨나요.
"지금 충남대 교수하는 친구가 세 다리 건너 아는 사람을 소개해 줬죠.경제기획원에 다닐 때입니다.
10월22일이었죠."
―날짜까지 기억하시네요.
"그럼요.
수첩에다 적어놓았는데요.
사실 아직도 생생해요.
친구랑 여자 두 분이 커피숍에 나왔죠.왼쪽이 괜찮고 오른쪽은 별로였어요.
그런데 왼쪽 분이 제가 소개받는 분이더라고요.
속으로 오늘 성공했구나 생각했죠.그때부터 아직까지 집사람은 저를 '홍 오빠'라고 부릅니다."
―그 다음엔 어떻게 됐나요.
"사귄 지 3개월쯤 지났을 때 성북동에 있는 처가에 갔어요.
무작정 쳐들어갔죠.알고 보니까 장인 어른 되실 분이 병중이라서 누워 계시더라고요.
제가 따님을 달라고 했죠.대답을 안 하시는 거예요.
다시 졸랐죠.나중에 승낙을 얻었습니다.
바로 몇 달 있다가 결혼했죠.이렇다 할 세간도 없이 냉장고 하나 달랑 사서 신혼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공무원 월급이 적었을 텐데요.
"아내가 엄청 고생했죠.공무원이 뭐 돈이 있겠습니까.
당시 월급이 3만5000원이었죠.술도 많이 먹으니까 그나마 집에 갖다주는 돈이 별로 없었어요.
월급날 되면 술집에서 외상값 받아가려고 줄을 섰으니까.
토요일,일요일 주말마다 일했으니까 아내가 좋아할 리가 없죠.집안 살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몰랐을 정도였어요."
―거의 기자들처럼 생활하셨네요.
(좌중 웃음)
"그랬죠.만날 나라 경제가 어떻고,5개년 계획 짜고 했습니다.
집안은 망해가는데…."
―사모님한테 원망은 안 들으셨나요.
"그때는 집사람이 원망을 안 했죠.불평도 없었고.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집사람이 아르바이트를 해서 생계를 꾸렸더라고요.
세무서에서 자료 정리하는 일이었죠.그래도 대한민국 경제기획원 사무관 마누라였는데.기가 막혔죠.이 얘기도 나중에 미국 유학생활 때야 들었습니다."
# 굿바이 공무원
―유학도 다녀오셨죠.
"국비 유학 있잖아요.
1호로 갔다온 셈이죠.공부하느라 고생도 많이 했습니다.
보람도 있었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미국 유학생활이 가장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내 인생의 전기도 거기서 마련했고요.
고시공부보다 훨씬 코피나게 공부했으니까요.
여행도 많이 다녔습니다.
그런데 제가 변하더라고요.
집안도 건사 못하는 사람이 무슨 경제정책을 짜느냐는 생각이 들었죠.그때 공직보다는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공직을 그만 두실 때 부인께서 찬성하시던가요.
"물론 반대했죠.부모님께서도 펄펄 뛰셨죠.유학생활을 마치고 와서 과장까지 일했습니다.
그런데 계속 고민이 되더라고요.
나 혼자 구름 잡는 일해서 뭐하나 하는….더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때 그 월급 갖고 애들 대학교 교육도 못 시키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5년 정도 고민하다가 때려치우고 나왔죠."
―공직에 대한 미련이 남았을 텐데요.
"장관을 지낸 박봉흠씨와 공정거래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낸 조학국씨 등 쟁쟁한 사람들이 고시 동기들이에요.
사실 그때는 저도 잘나가는 편이었죠.어쨌든 지금은 집사람이 제일 좋아합니다.
그때 잘 나왔다고.저도 아주 잘했다고 생각해요.
왜냐고요? 제가 가족들을 잘 보살필 수 있으니까요.
장관하는 것보다,꿈을 작게 잡으니까 마음도 편하더라고요."
―첫 직장이 동부그룹이었는데 인연이 있었나요.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님은 제가 몰랐어요.
아는 분 소개로 입사를 했죠."
―금방 적응하셨나요.
"물론 기업이 공직과는 다른 점이 많죠.그런데 생각보다 많이 다르지 않습디다.
어느 정도 위치에 올라가면 정책과 전략을 판단하는 건 똑같죠.투자 여부를 분석하고 구조조정 판단하고,뭐 그런 건 비슷하죠."
―동부를 왜 떠나셨죠.
"한 5년이 지나니까 김 회장님하고 의견 차이가 조금씩 생기더라고요.
동부그룹을 퇴사하기 며칠 전에 김 회장님과 술잔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제가 회장님께 많이 배웠다고 했죠.그게 사실이고요.
제게는 고마운 분이죠."
# 동양에서 다시 서다
―동양에는 어떻게 오시게 되셨나요.
"동양에 진념 전 장관과 전주고 동기인 채오병 사장이라는 분이 있었어요.
진 전 장관이 저를 추천해서 동양으로 왔죠.결국 채 사장님이 저를 동양으로 데리고 오신거죠.이거 처음 얘기하는 겁니다."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님은 어떤 분이시죠.
"잘 아시잖아요.
인품,영어실력,교양,지식….뭐 하나 흠잡을 데가 없는 분이죠."
―그룹으로 들어오신 건가요.
"예. 그룹 기획조정실로 들어왔죠.금융과 보험 담당 전무였습니다."
―최고경영자(CEO)는 언제 되신 거죠.
"입사하고 한 100일 정도 지났을 때였습니다.
현 회장님이 부르시더라고요.
1995년께 아멕스카드를 인수하니까 맡아서 해보라는 얘기를 하셨죠."
―지금의 동양카드네요.
"예.처음엔 힘들었어요.
십수년을 적자 내던 회사였으니까.
가맹점 수는 1만2000개에 회원은 5만명 정도였죠.당시는 정말 보잘것없는 회사였어요.
하지만 일하는 것은 그때가 제일 재미있었어요.
처음 사장을 해보는 데다,회사 키우는 보람도 있었고요.
그때부터 달마다 호프데이도 하고 퇴근할 때 불켜진 사무실이 있으면,직원들을 데리고 나가서 술 사주고 그랬죠."
―동양에 와서 가장 보람을 느끼신 때가 있다면요.
"1998년 동양생명을 맡았을 때죠.완전히 죽기 직전의 회사를 맡아 살려냈죠."
―힘드셨겠어요.
"정말 힘들었습니다.
말 그대로 동네방네 뛰어다니며 열심히 했죠.동양생명을 그만둘 때 임직원에게 수호천사 브랜드를 만든 사람으로만 기억해달라고 했죠.눈물이 나더라고요.
그리고 폭탄주 다섯 잔 먹고 나왔어요."
―수호천사를 직접 만드셨나요.
"그럼요.
직접 작명하고 관리했죠.수호천사 얘기가 나오니까 완전 '업'되네요.
수호천사 얘기 좀 할게요."
―수호천사에 대해 할 얘기가 많으신가 봐요.
"당연하죠.동양생명에서 수호천사라는 브랜드 만들고 쓰러지기 직전의 회사를 1000억원대 이익이 나는 회사로 바꿨으니까요.
당시 보험상품 구조도 저축성 위주로 되어 있었는데 모두 보장성으로 바꿨습니다.
특히 수호천사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죠.대한민국 보험 역사상 브랜드 마케팅은 제가 처음 했거든요.
아마 은퇴하고도 두고두고 가장 보람찬 일로 기억될 겁니다."
―브랜드 작업과 광고는 어떻게 시작된 겁니까.
"일단 임직원 기를 살리기 위해 전 지점과 영업소를 돌아다녔어요.
아까 말한 것처럼 술도 먹고 그랬죠.순시 때 직원들뿐만 아니라 설계사들까지 다 만났어요.
그런데 설계사들이 광고 좀 해달라고 애원하는 겁니다.
무슨 광고냐니까,우리 회사는 돈이 없어서 광고도 안 낸다는 겁니다.
동양생명 설명해봐야 모른다는 거죠.사람 만날 때 15초 안에 보험 들지 말지를 결정한다는데 동양생명 회사 설명하다보면,얘기가 끝난다는 겁니다."
# 구원투수 인생
―동양생명 이후 동양시스템즈에 가셨죠.
"예.제가 자리를 옮길 때(2003년)는 좋은 상태였죠.하지만 기업도 주기가 있어서인지 6개월이 지나니까 확 가버리더라고요.
한 해가 지나면서부터 급여도 깎고 난리를 쳤죠.자존심도 많이 상했어요.
승진을 시키고 보너스를 줘야지 보람이 있는데….그나마 다음해 수익성이 좋아져 못줬던 급여까지 곧바로 다 돌려줬죠."
―한일합섬에서도 잠시 계셨는데요.
"회사를 맡을 때마다 그랬지만,제 스스로 옮긴 건 아니죠.그냥 동양그룹 구원투수였지.아마 동양시스템즈만 제 뜻대로 해주신 것 같아요.
회사를 맡을 당시 이익을 내고 있던 회사도 동양시스템즈가 처음이었고요.
동양시스템즈에서 잘 있다가 그룹에서 한일합섬을 인수하면서 다시 옮기게 된 거죠."
―결국 설득당하신 건가요.
"그렇죠.현 회장님이 저랑 동갑인데,저보고 그룹의 원로라고 하시더라고요.
'아 내가 이제 원로구나' 생각했죠.그래서 회장님 말씀대로 한일합섬을 맡아,인수작업 진두지휘하고 들어간 겁니다."
―원로라는 말에 넘어가셨네요.
"그렇죠.원로라는 말 때문에…."
―한일합섬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건설,레저,기계 등 의류와 관계 없는 사업부문을 모두 떼어내는 작업을 했죠.한일합섬은 의류와 패션 전문기업으로 변할 겁니다.
투자도 많이 이뤄질 거고요."
―힘든 기업만 주로 맡다보니,구조조정을 많이 하셨겠어요.
"팔자죠.그래도 보람은 있습니다.
동양카드,동양생명,동양시스템즈 다 기억에 남죠.사실 경제기획원에서 산업3과장 하면서 제가 국내 해운업,조선업 다 정리하고 나왔어요.
그때부터 구조조정 인생이 시작됐나 봅니다."
# 거짓말은 절대 말아야
―어떤 직원이 제일 밉나요.
"거짓말 하는 직원을 제일 싫어합니다.
잘못했습니다,봐주십시오 하면 됩니다.
자꾸 돌려서 이야기하다 보면,거짓말도 하고 나쁜 짓도 하게 되죠.저는 성격이 직설적이어서 사실대로 이야기를 주고받아야 합니다.
그게 서로 편하고요."
―바른말 하는 부하 직원들을 좋아하시겠어요.
"당연하죠.'예'밖에 모르는 직원보다 훨씬 낫죠.때로는 윗사람에게 거슬리게 들릴지라도 할 말은 해야 합니다.
그게 진정한 상하 관계죠.서로를 위할 줄 아는 것이고요.
그런 게 제대로 된 경영의 시작입니다."
―경영이 좀 공격적인 스타일인 것 같아요.
"스타일 자체가 좀 그렇죠.도전을 즐기는 스타일입니다.
특히 지금까지 큰 실패를 하지 않아서 그런지,더 공격적인 것 같습니다.
저는 내기를 할 때도 그래요."
―골프도 공격적인가요.
"핸디 7입니다.
그 정도면 보통은 치는 거죠.저보다 30~40야드 더 치는 사람과 쳐도 저는 걱정을 안 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세컨드샷으로 붙이고,안 올라가면 어프로치해서 넣어버리면 된다는 배짱으로 치니까요."
―홀인원도 해보셨나요.
"그럼요.
한 2년 전에 수원CC에서 했죠."
―인생 자체가 별로 실패한 경험이 없으신가요.
"해보고 싶은 건 다 해봤죠.큰 실패도 없었고요.
다만 저는 인생에 가이드가 없었어요.
그래서 조금 무모한 면도 있죠."
―어쨌든 최고의 인생을 사신 거잖아요.
"원가가 안 들어간 인생이니까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얼마 전 장모님에게서 우리 구 서방이 최고라는 칭찬을 들었어요.
굉장히 기분 좋았습니다.
한 30년 살고 나서 장모님이 사위 잘 봤다고 했으니 그만하면 된 거죠.괜찮은 인생인 것 같습니다."
정리=장창민 기자 cmjang@hankyung.com
사진=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과 카랑카랑한 목소리.마치 무인(武人)을 연상케 했다.
구자홍 동양투신운용 부회장(57)의 첫인상이다.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나 경제기획원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다 민간 기업으로 옮긴 구 부회장.그는 기업에서 구조조정을 많이 한 최고경영자(CEO)에 속한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구 부회장은 부드러운 CEO였다.
인간미 넘치는 솔직함이 구수한 '촌놈(?)'의 말투에 그대로 묻어나왔다.
대화를 유쾌하게 이끄는 유머와 재치도 일품이었다.
구 부회장은 인터뷰 내내 "내가 오늘 너무 발거벗는 것 아니냐"고 했다.
실제로 구 부회장은 거침없이 다 쏟아냈다.
한때 하루에 100여잔이 넘게 술을 마셨다는 구 부회장.인사동의 한 음식점에서 5시간에 걸쳐 풀어낸 그의 인생사는 한 편의 소설 같았다.
# 12살…인생의 빅딜
―공부는 잘하셨죠.
"공부요.
잘했죠.저는 원가가 안 들어간 사람이에요.
과외나 뭐 이런 거 없었죠.대학도 전액 장학금 받고 다녔어요.
서울 상대 다닐 때 등록금이 1만6000원이었죠.지금까지 저한테 들어간 돈은 아주 적어요.
원가가 안 들어간 만큼 뭘 해도 손해 볼 것 없다는 생각을 하죠."
―학비는 어떻게 버셨나요.
"원래 시골 촌놈들은 다 입주 과외를 했거든요. 집에서 애들 가르치고,용돈받아 생활했죠."
―전주에서 초♥중♥고를 졸업하셨죠.
"고향은 전북 진안입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전주로 하숙을 나왔죠.생각해 보세요.
12살짜리가 혼자 하숙을 했으니까 얼마나 불쌍해요.
그래도 꾹 참고 지냈죠."
―전주가 제2의 고향이시네요.
"그런 셈이죠.초등학교부터 전주고까지 쭉 다녔으니까요.
지금 생각해 봐도 초등학교 때 전주로 이사오길 잘 한 것 같아요.
그때 계속 시골에 있었으면 농사짓고 있었겠죠.그것도 좋긴 하지만,지금 같은 기회는 없었을 겁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인생의 빅딜'을 한 셈이죠."
# 아! 마누라
―이성한테 인기가 많으셨을 것 같은데 연애결혼 하셨나요.
"지금 충남대 교수하는 친구가 세 다리 건너 아는 사람을 소개해 줬죠.경제기획원에 다닐 때입니다.
10월22일이었죠."
―날짜까지 기억하시네요.
"그럼요.
수첩에다 적어놓았는데요.
사실 아직도 생생해요.
친구랑 여자 두 분이 커피숍에 나왔죠.왼쪽이 괜찮고 오른쪽은 별로였어요.
그런데 왼쪽 분이 제가 소개받는 분이더라고요.
속으로 오늘 성공했구나 생각했죠.그때부터 아직까지 집사람은 저를 '홍 오빠'라고 부릅니다."
―그 다음엔 어떻게 됐나요.
"사귄 지 3개월쯤 지났을 때 성북동에 있는 처가에 갔어요.
무작정 쳐들어갔죠.알고 보니까 장인 어른 되실 분이 병중이라서 누워 계시더라고요.
제가 따님을 달라고 했죠.대답을 안 하시는 거예요.
다시 졸랐죠.나중에 승낙을 얻었습니다.
바로 몇 달 있다가 결혼했죠.이렇다 할 세간도 없이 냉장고 하나 달랑 사서 신혼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공무원 월급이 적었을 텐데요.
"아내가 엄청 고생했죠.공무원이 뭐 돈이 있겠습니까.
당시 월급이 3만5000원이었죠.술도 많이 먹으니까 그나마 집에 갖다주는 돈이 별로 없었어요.
월급날 되면 술집에서 외상값 받아가려고 줄을 섰으니까.
토요일,일요일 주말마다 일했으니까 아내가 좋아할 리가 없죠.집안 살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몰랐을 정도였어요."
―거의 기자들처럼 생활하셨네요.
(좌중 웃음)
"그랬죠.만날 나라 경제가 어떻고,5개년 계획 짜고 했습니다.
집안은 망해가는데…."
―사모님한테 원망은 안 들으셨나요.
"그때는 집사람이 원망을 안 했죠.불평도 없었고.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집사람이 아르바이트를 해서 생계를 꾸렸더라고요.
세무서에서 자료 정리하는 일이었죠.그래도 대한민국 경제기획원 사무관 마누라였는데.기가 막혔죠.이 얘기도 나중에 미국 유학생활 때야 들었습니다."
# 굿바이 공무원
―유학도 다녀오셨죠.
"국비 유학 있잖아요.
1호로 갔다온 셈이죠.공부하느라 고생도 많이 했습니다.
보람도 있었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미국 유학생활이 가장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내 인생의 전기도 거기서 마련했고요.
고시공부보다 훨씬 코피나게 공부했으니까요.
여행도 많이 다녔습니다.
그런데 제가 변하더라고요.
집안도 건사 못하는 사람이 무슨 경제정책을 짜느냐는 생각이 들었죠.그때 공직보다는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공직을 그만 두실 때 부인께서 찬성하시던가요.
"물론 반대했죠.부모님께서도 펄펄 뛰셨죠.유학생활을 마치고 와서 과장까지 일했습니다.
그런데 계속 고민이 되더라고요.
나 혼자 구름 잡는 일해서 뭐하나 하는….더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때 그 월급 갖고 애들 대학교 교육도 못 시키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5년 정도 고민하다가 때려치우고 나왔죠."
―공직에 대한 미련이 남았을 텐데요.
"장관을 지낸 박봉흠씨와 공정거래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낸 조학국씨 등 쟁쟁한 사람들이 고시 동기들이에요.
사실 그때는 저도 잘나가는 편이었죠.어쨌든 지금은 집사람이 제일 좋아합니다.
그때 잘 나왔다고.저도 아주 잘했다고 생각해요.
왜냐고요? 제가 가족들을 잘 보살필 수 있으니까요.
장관하는 것보다,꿈을 작게 잡으니까 마음도 편하더라고요."
―첫 직장이 동부그룹이었는데 인연이 있었나요.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님은 제가 몰랐어요.
아는 분 소개로 입사를 했죠."
―금방 적응하셨나요.
"물론 기업이 공직과는 다른 점이 많죠.그런데 생각보다 많이 다르지 않습디다.
어느 정도 위치에 올라가면 정책과 전략을 판단하는 건 똑같죠.투자 여부를 분석하고 구조조정 판단하고,뭐 그런 건 비슷하죠."
―동부를 왜 떠나셨죠.
"한 5년이 지나니까 김 회장님하고 의견 차이가 조금씩 생기더라고요.
동부그룹을 퇴사하기 며칠 전에 김 회장님과 술잔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제가 회장님께 많이 배웠다고 했죠.그게 사실이고요.
제게는 고마운 분이죠."
# 동양에서 다시 서다
―동양에는 어떻게 오시게 되셨나요.
"동양에 진념 전 장관과 전주고 동기인 채오병 사장이라는 분이 있었어요.
진 전 장관이 저를 추천해서 동양으로 왔죠.결국 채 사장님이 저를 동양으로 데리고 오신거죠.이거 처음 얘기하는 겁니다."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님은 어떤 분이시죠.
"잘 아시잖아요.
인품,영어실력,교양,지식….뭐 하나 흠잡을 데가 없는 분이죠."
―그룹으로 들어오신 건가요.
"예. 그룹 기획조정실로 들어왔죠.금융과 보험 담당 전무였습니다."
―최고경영자(CEO)는 언제 되신 거죠.
"입사하고 한 100일 정도 지났을 때였습니다.
현 회장님이 부르시더라고요.
1995년께 아멕스카드를 인수하니까 맡아서 해보라는 얘기를 하셨죠."
―지금의 동양카드네요.
"예.처음엔 힘들었어요.
십수년을 적자 내던 회사였으니까.
가맹점 수는 1만2000개에 회원은 5만명 정도였죠.당시는 정말 보잘것없는 회사였어요.
하지만 일하는 것은 그때가 제일 재미있었어요.
처음 사장을 해보는 데다,회사 키우는 보람도 있었고요.
그때부터 달마다 호프데이도 하고 퇴근할 때 불켜진 사무실이 있으면,직원들을 데리고 나가서 술 사주고 그랬죠."
―동양에 와서 가장 보람을 느끼신 때가 있다면요.
"1998년 동양생명을 맡았을 때죠.완전히 죽기 직전의 회사를 맡아 살려냈죠."
―힘드셨겠어요.
"정말 힘들었습니다.
말 그대로 동네방네 뛰어다니며 열심히 했죠.동양생명을 그만둘 때 임직원에게 수호천사 브랜드를 만든 사람으로만 기억해달라고 했죠.눈물이 나더라고요.
그리고 폭탄주 다섯 잔 먹고 나왔어요."
―수호천사를 직접 만드셨나요.
"그럼요.
직접 작명하고 관리했죠.수호천사 얘기가 나오니까 완전 '업'되네요.
수호천사 얘기 좀 할게요."
―수호천사에 대해 할 얘기가 많으신가 봐요.
"당연하죠.동양생명에서 수호천사라는 브랜드 만들고 쓰러지기 직전의 회사를 1000억원대 이익이 나는 회사로 바꿨으니까요.
당시 보험상품 구조도 저축성 위주로 되어 있었는데 모두 보장성으로 바꿨습니다.
특히 수호천사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죠.대한민국 보험 역사상 브랜드 마케팅은 제가 처음 했거든요.
아마 은퇴하고도 두고두고 가장 보람찬 일로 기억될 겁니다."
―브랜드 작업과 광고는 어떻게 시작된 겁니까.
"일단 임직원 기를 살리기 위해 전 지점과 영업소를 돌아다녔어요.
아까 말한 것처럼 술도 먹고 그랬죠.순시 때 직원들뿐만 아니라 설계사들까지 다 만났어요.
그런데 설계사들이 광고 좀 해달라고 애원하는 겁니다.
무슨 광고냐니까,우리 회사는 돈이 없어서 광고도 안 낸다는 겁니다.
동양생명 설명해봐야 모른다는 거죠.사람 만날 때 15초 안에 보험 들지 말지를 결정한다는데 동양생명 회사 설명하다보면,얘기가 끝난다는 겁니다."
# 구원투수 인생
―동양생명 이후 동양시스템즈에 가셨죠.
"예.제가 자리를 옮길 때(2003년)는 좋은 상태였죠.하지만 기업도 주기가 있어서인지 6개월이 지나니까 확 가버리더라고요.
한 해가 지나면서부터 급여도 깎고 난리를 쳤죠.자존심도 많이 상했어요.
승진을 시키고 보너스를 줘야지 보람이 있는데….그나마 다음해 수익성이 좋아져 못줬던 급여까지 곧바로 다 돌려줬죠."
―한일합섬에서도 잠시 계셨는데요.
"회사를 맡을 때마다 그랬지만,제 스스로 옮긴 건 아니죠.그냥 동양그룹 구원투수였지.아마 동양시스템즈만 제 뜻대로 해주신 것 같아요.
회사를 맡을 당시 이익을 내고 있던 회사도 동양시스템즈가 처음이었고요.
동양시스템즈에서 잘 있다가 그룹에서 한일합섬을 인수하면서 다시 옮기게 된 거죠."
―결국 설득당하신 건가요.
"그렇죠.현 회장님이 저랑 동갑인데,저보고 그룹의 원로라고 하시더라고요.
'아 내가 이제 원로구나' 생각했죠.그래서 회장님 말씀대로 한일합섬을 맡아,인수작업 진두지휘하고 들어간 겁니다."
―원로라는 말에 넘어가셨네요.
"그렇죠.원로라는 말 때문에…."
―한일합섬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건설,레저,기계 등 의류와 관계 없는 사업부문을 모두 떼어내는 작업을 했죠.한일합섬은 의류와 패션 전문기업으로 변할 겁니다.
투자도 많이 이뤄질 거고요."
―힘든 기업만 주로 맡다보니,구조조정을 많이 하셨겠어요.
"팔자죠.그래도 보람은 있습니다.
동양카드,동양생명,동양시스템즈 다 기억에 남죠.사실 경제기획원에서 산업3과장 하면서 제가 국내 해운업,조선업 다 정리하고 나왔어요.
그때부터 구조조정 인생이 시작됐나 봅니다."
# 거짓말은 절대 말아야
―어떤 직원이 제일 밉나요.
"거짓말 하는 직원을 제일 싫어합니다.
잘못했습니다,봐주십시오 하면 됩니다.
자꾸 돌려서 이야기하다 보면,거짓말도 하고 나쁜 짓도 하게 되죠.저는 성격이 직설적이어서 사실대로 이야기를 주고받아야 합니다.
그게 서로 편하고요."
―바른말 하는 부하 직원들을 좋아하시겠어요.
"당연하죠.'예'밖에 모르는 직원보다 훨씬 낫죠.때로는 윗사람에게 거슬리게 들릴지라도 할 말은 해야 합니다.
그게 진정한 상하 관계죠.서로를 위할 줄 아는 것이고요.
그런 게 제대로 된 경영의 시작입니다."
―경영이 좀 공격적인 스타일인 것 같아요.
"스타일 자체가 좀 그렇죠.도전을 즐기는 스타일입니다.
특히 지금까지 큰 실패를 하지 않아서 그런지,더 공격적인 것 같습니다.
저는 내기를 할 때도 그래요."
―골프도 공격적인가요.
"핸디 7입니다.
그 정도면 보통은 치는 거죠.저보다 30~40야드 더 치는 사람과 쳐도 저는 걱정을 안 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세컨드샷으로 붙이고,안 올라가면 어프로치해서 넣어버리면 된다는 배짱으로 치니까요."
―홀인원도 해보셨나요.
"그럼요.
한 2년 전에 수원CC에서 했죠."
―인생 자체가 별로 실패한 경험이 없으신가요.
"해보고 싶은 건 다 해봤죠.큰 실패도 없었고요.
다만 저는 인생에 가이드가 없었어요.
그래서 조금 무모한 면도 있죠."
―어쨌든 최고의 인생을 사신 거잖아요.
"원가가 안 들어간 인생이니까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얼마 전 장모님에게서 우리 구 서방이 최고라는 칭찬을 들었어요.
굉장히 기분 좋았습니다.
한 30년 살고 나서 장모님이 사위 잘 봤다고 했으니 그만하면 된 거죠.괜찮은 인생인 것 같습니다."
정리=장창민 기자 cmjang@hankyung.com
사진=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