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무터 < 웨스틴조선호텔 총주방장 >


"한국은 내게 운명(destiny)과도 같은 곳입니다. 조리사로 세계 각지를 다녔지만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곤 했죠.이번이 벌써 세 번째입니다. 한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국제적인 행사가 있을 때마다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에 특별한 자부심을 느낍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과 2002년 월드컵,2005년 부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가 열릴 때였죠."

스위스 출신의 웨스틴조선호텔 총주방장인 찰스 무터씨(47)는 설명하기 힘든 어떤 강력한 힘이 자신을 한국으로 끌어당겼다고 말한다.

기자가 생각해도 '운명'이란 단어 외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였을까.

세 번째 한국을 찾으면서 공항에서 느꼈던 향취를 그는 잊지 못한다.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김치와 마늘,된장과 두부 냄새가 코끝으로 밀려드는 듯했죠.너무나 그리웠던 냄새들이었습니다. 그때가 2005년 7월 장마 기간이었는데,후텁지근한 습기마저 반가웠습니다. 직전 근무지인 이집트에서 견뎌야 했던 숨이 턱턱 막히는 열사의 바람보다는 장마의 습기가 한결 나았던 거죠."

한국과의 첫 번째 인연은 1988년 찾아왔다.

당시 9년 경력의 조리사로 홍콩의 한 호텔에서 일하던 그는 한 발 더 동쪽으로 내딛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20대의 팔팔한 나이여서 더 많은 나라의 음식과 문화를 접하고 싶었던 때였다.

마침 스위스그랜드호텔(현 그랜드힐튼호텔)이 서울 홍은동에 문을 열면서 조리사를 찾았고 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에게 한국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새로운 곳이었다.

조리사라는 직업적 본능으로 표현한다면 뭔가 깊이 우러나는 맛을 느꼈다고 한다.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모험에 나선 듯했다.

날씨 풍광 사람들 음식 말 등 모든 것이 특별했다.

안개구름에 휩싸인 설악산은 순수와 진실 그 자체였다고 추억을 꺼내들었다.

"혼자서 설악산에 갔었느냐"고 묻자 "그럴 리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지금의 아내랑 설악산의 신비와 순수를 경험했다고 말했다.

그의 아내는 스위스그랜드호텔의 한 패션숍에서 일하던 한국 여성이었다.

"아내를 점찍고는 그 숍에 들어가서 양복을 고르고 말을 걸고 하면서 데이트를 시작했죠.한강변과 남이섬을 가고 설악산도 갔습니다. 나보다 두 살 많았는데도 왜 그리 예뻐 보였을까요?" 그는 아내와 1년반 동안 연애를 하고는 홍콩으로 다시 직장을 옮겼다.

그를 그냥 돌려보낼 수 없었던 아내도 따라 나섰다.

결국 홍콩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한국으로 신혼여행을 와서는 그들이 만난 스위스그랜드호텔에서 결혼식을 한 번 더 올렸다.

서울 올림픽 당시의 기억을 되살리자 그의 목청은 더욱 우렁우렁해졌다.

세계 각지에서 밀려든 선수와 VIP,관람객들의 식사를 책임지면서 '조리사 한국 국가대표팀'이 된 듯했다고 한다.

실제로 당시 국내 호텔들은 잠실 올림픽선수촌 등에 식사를 나르느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서울 올림픽 주제가처럼 주요 호텔 조리사들이 '손에 손잡고(hand in hand)' 일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할 정도였지만 정말 재밌었던(exciting) 추억이라고 그는 소개했다.

그는 또 "사마란치 당시 국제올림픽조직위원회(IOC) 위원장이 스위스그랜드호텔의 이탈리아 식당을 찾았을 때 직접 시푸드 파스타를 만들어줬다"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무터씨는 이후 한국의 음식과 문화를 자신이 일하는 외국 호텔에서 적극 알려 나갔다.

마치 자신이 '대사(Ambassodor)'가 된 것 같았다.

이집트 쉐라톤 미라마 엘구아나에서 일할 때는 아내가 다른 조리사들에게 김치 비빔밥 된장찌개 같은 한국음식 만드는 법을 직접 가르쳤다.

한국 관광객이 늘다 보니 자연 한국음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APEC 때 재밌었던 기억은 없느냐고 묻자 그는 빙긋이 웃었다.

"프레지던트(대통령) 버거라고 들어보셨나요?"

부산 웨스틴조선호텔 총주방장으로 일하던 그에게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손님이 됐던 것.그는 부시 대통령을 위해 횡성 한우로 만든 햄버거를 만들어 히트를 쳤다고 한다.

그래서 붙은 이름이 프레지던트 버거다.

그는 "하루 프레지던트 버거 주문량만 60개를 넘었다"며 "부시 측에서 전화로 'more and more hamburger'라고 외쳤다"고 말했다.

이 호텔에서는 아직도 프레지던트 버거를 메뉴에 올려 개당 1만7500원에 판매하고 있다.

그는 최근 조선호텔과 2년 계약이 끝났지만 다시 2년을 연장했다.

이제 정착할 나이가 됐는데 한국도 정착지 중 하나로 '심각하게' 고려 중이라고 한다.

영어 독일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등 4개 국어를 구사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한국음식인 된장찌개 백반을 언제든 쉽게 먹을 수 있는 곳은 한국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뒤따른다.

12년째 즐기는 스킨스쿠버 다이빙을 하기에는 한국 바다가 너무 춥다는 점만 빼고 말이다.

장규호 기자 daniel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