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장 여자' 빌려 동성애에 대한 고민 깊게 다뤄

장궈룽(張國榮)과 웬융의(袁詠儀) 주연의 '금지옥엽'(1994)이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는 자신이 우상으로 삼고 있는 작곡가 샘(장궈룽 분)을 만나기 위해 그가 남자 신인 가수를 선발하는 오디션에 자영(웬융의)이 남장 여자로 응모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얼결에 자영은 오디션에 합격하고 샘과 합숙훈련을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샘은 동성인 자영에게 자꾸 끌리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고 혹시 자신이 게이가 아닌지 고민한다.

그러다 결국 샘과 자영은 진한 키스를 나누게 되고 그런 자신의 행동에 충격을 받은 샘은 사라져버린다.

MBC 드라마 '커피 프린스 1호점'을 보며 '금지옥엽'을 떠올리는 사람들은 영화 속 웬융의의 모습과 드라마 속 윤은혜를 겹쳐보는 재미를 느낄 것이다.

짧은 커트 머리에 깡마른 체구, 귀엽고 발랄한 행동 등은 도무지 여성인지 남성인지를 분간하지 못하게 하며 남녀를 동시에 사로잡는 마력을 발휘한다.

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를 비롯해 이들 작품은 남장 여자로 인한 극적인 긴장감과 애틋함을 준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그런데 1시간40분 분량의 짧은 로맨틱 코미디인 까닭에 샘이 자신의 성적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부분 역시 얄팍했던 '금지옥엽'과 달리, 60분 분량의 16부작 미니시리즈 드라마 '커피 프린스 1호점'에서는 동성을 향한 마음이 상당히 깊게 그려져 눈길을 끈다.

은은한 커피향에 취해 가볍게 산보를 나섰다가 생각지도 못했던 모험을 하게 된 심정이다.

◇"난 게이가 아니야. 그러니까 날 유혹하지마"
마냥 말랑말랑할 것만 같은 청춘 멜로 드라마가 부지불식간에 인간애에 대해 근원적인 고민을 던져주고 있다.

얼마 전 SBS '내 남자의 여자'가 극단적인 불륜으로 떠들썩한 화제를 모았는데, 사실은 '커피 프린스 1호점'의 시선이 더욱 도발적이고 대담하다.

무엇보다 부작용이나 거부감 없이 동성애에 대해 시청자들이 생각해보게 만들고 있다.

한 여자를 9년간이나 절절하게 짝사랑해온 남자 한결(공유)이 어느 순간부터 동생 같은 소년 은찬(윤은혜)에게 끌리는 자신을 발견하며 혼란스러워한다.

여기까지는 다분히 예상가능한 전개. 이 정도쯤이야.
그런데 30일 방송된 9회에서 드라마는 돌연 뒤통수를 세게 후려친다.

출생의 비밀에 괴로워 '의형제' 은찬을 데리고 밤바다를 찾아 떠났던 한결은 이곳에서 그만 한계에 부딪히고 만다.

잠들어 있는 은찬에게 숨 넘어갈 듯 떨리는 손짓을 하며 조용히 눈물을 흘린 한결은 남자인 은찬에게 속수무책으로 빨려들어가는 마음을 발견하고 두 손을 들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막아야 한다는 이성에 은찬과의 인위적인 이별을 결심한다.

그간의 애틋한 마음을 다잡기 위한 방편으로 은찬에게 '의형제'라는 안전장치를 제안했던 한결이었지만 그마저 소용이 없었던 것.
"난 게이가 아니야"라는 주문을 외우는 한결은, 갑자기 돌변한 이유를 묻는 은찬에게 "넌 그게 그리 쉽니? 넌 쉽구나.

별거 아니구나"라며 피하는 길을 선택한다.

◇"남자든 여자든 인간적으로 끌리는 게 중요하지"
물론 지난해에는 이송희일 감독의 영화 '후회하지 않아'가 퀴어 멜로로는 이례적으로 흥행에 성공했고, 1999년에는 주진모ㆍ김갑수 주연의 드라마 '슬픈 유혹'(극본 노희경, 연출 표민수)이 KBS를 통해 방송되기도 했다.

처음이 아니라는 얘기. 그러나 두 드라마 모두 동성애를 정공법으로 질펀하게 다뤘던 것과 달리 '커피 프린스 1호점'은 하늘하늘 에둘러가는 방법을 택했다.

그래서 시청자들은 9회 한결이 고통에 몸부림치는 장면을 보면서 장난 치며 잽을 주고받던 상대에게 심장 한가운데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이미 2만여 건이 넘는 글이 올라온 '커피 프린스 1호점'의 시청자 게시판에는 이날 방송 후 '이 사태를 어쩌면 좋으냐'는 내용의 토로가 이어지고 있다.

물론 시청자는 은찬이 여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래서 웃어넘길 수도 있지만 그러기에는 한결의 괴로움이 정색을 하고 슬프게 다가오는 것. 일부 시청자들은 '동성애 드라마로 가는 거냐' '동성애를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거냐'며 불쾌감을 드러내기도 하는 가운데 전반적으로는 드라마가 안내하는 방향으로 순순히 빠져들어가고 있다.

이런 와중에 극중 선기(김재욱)가 무심히 던진 말 한마디가 의미 심장하다.

"하긴 남자든, 여자든 인간적으로 끌리는 게 중요하지."

방송에 앞서 이윤정 PD는 "의도를 가지고 만들지 않았기에 단지 재밌었으면 한다"고 말하면서도 "사랑한다고 말하기 전에 많은 증거를 보여줘도 사랑을 의심하지 않나.

마음의 실체를 보지 않기에.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깊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청춘 멜로 드라마에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는 묵직하고 진지한 주제를 이렇게 자연스럽게 녹여냈다는 것은 분명 이 드라마의 특별한 미덕이다.

'커피 프린스 1호점'은 12회께 한결이 은찬의 정체를 알게 되면서 클라이맥스를 맞게 된다.

결국에는 구태의연한 신데렐라 스토리로 끝날지라도 이 드라마는 이미 충분히 의미 있는 작업을 한 것으로 보인다.

(서울연합뉴스) 윤고은 기자 pretty@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