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운 10년 여는 사람들 - 패션디자이너 정욱준 >

"트렌치코트의 새로운 해석으로 佛컬렉션에 신선한 충격 줬죠"

신(神)은 여자에게 산고(産苦)를 줬고 예술가에겐 창작의 고통을 떠안겼다.

봄·여름과 가을·겨울 두 시즌에 맞춰 늘 새로운 '무엇'으로 세상과 만나야 하는 패션 디자이너는 어떨까.

남성복 디자이너 정욱준은 패션쇼를 앞두고 밤을 하얗게 지새는 기간에 "머리로 아이를 낳는 것 같은 고통을 느낀다"고 말한다.

지난 17일 찾은 서울 신사동 그의 작업실은 담배 연기로 자욱했다.

여기저기 흩어진 옷가지들과 책상에 수북하게 쌓여 있는 사진들….그 속에서 그는 "머리와 손으로 계속 무엇인가를 부수고 만느는 중"이었다.

#파리의 도전

지난달의 파리는 정욱준에게 '세계로 통하는 창'을 열어줬다.

28일부터 나흘간 열린 '파리 2008 봄·여름 컬렉션'에서 그는 준지(JUUN.J)라는 이름으로 세계 패션계에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르 피가로'는 컬렉션에 참가한 디자이너 150여명 가운데 주목받는 6명에 정욱준을 포함시켰다.

"좌석이 200석 정도였는데 (파리 컬렉션은 바이어와 기자들을 중심으로 초청자를 선별하기 때문에 좌석이 많지 않다) 350명이 넘게 왔어요.

제가 얘기하긴 좀 쑥스럽지만 '트렌치 코트를 자기 것으로 재해석했다'는 평가를 받았어요." 컬렉션에 참가한 신인들의 패션쇼엔 보통 30명 정도 참석하는 점을 감안하면 뜨거운 반응이었다.

'론 커스텀(Lone custom)'이란 브랜드로 2002년부터 서울 컬렉션에 참가하며 국내에서 각광받아온 그였지만,사실 세계로 나가는 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도전'의 시기를 저울질하던 그는 세계적인 디자이너의 꿈을 이루기 위해 지난 1월 승부수를 던졌다.

"제 작품을 들고 무작정 파리로 갔어요.

토템 프레신과 같은 세계적인 에이전트 회사를 찾았죠.라프 시몬즈,베로니크 브랑킨호,베르나르 윌헴 등 촉망받는 디자이너를 보유한 회사들인데 '나에게 관심이나 있을까' 걱정도 많았죠."

한국에서 온 자그마한 디자이너.1시간이 넘도록 기다리게 만든 콧대 높은 에이전트 관계자들은 작품을 보여주자 "우리가 찾던 스타일"이라며 술렁이기 시작했다.

프레신은 '행거를 비워 줄 테니 옷을 걸고 가라'고 했다.

그의 옷이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의 옷과 함께 행거에 걸리는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그는 이후 토템과 PR계약을 맺었고 세계 주요도시에 '준지'를 팔아 줄 에이전트도 확보했다.

#옷 입기 싫어하던 아이가….

정욱준은 어린 시절부터 디자이너가 될 운명이었나 보다.

아동복 제조·도매업을 했던 부모님은 새 옷이 나올 때마다 아들에게 갈아 입혔다.

"제가 입어보고 '예쁘다'고 하면 그 아동복은 히트를 쳤고 '이 옷 싫어'라고 하면 판매가 부진했다고 그러세요.

옷과 친숙하게 지낸 터라 대학도 의상학과를 가려고 했었죠." 하지만 당시만 해도 남자가 의상학과를 간다는 것은 쑥스러운(?) 일이었다.

망설이던 그는 결국 미대에 진학했다.

제대를 앞두고 '내가 진짜로 좋아하는 게 뭘까?'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던졌고 결국 '의상이 나의 길이구나'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대학을 과감히 중퇴하고 디자인 스쿨인 에스모드(es-mode) 서울에 들어가 3년간 "행복하게 공부했다"고 한다.

에스모드를 졸업한 정욱준은 남성복 브랜드 '쉬퐁'을 시작으로 디자인 업계에 얼굴을 내밀었고 1997년엔 '닉스' 디자인 팀장의 자리에 올랐다.

"패션기업 디자인 팀장은 아주 좋은 자리죠.하지만 갈증이 있었어요.

내 옷을 만들지 못하고 언제나 다른 디자인을 모방해야 했던 게 늘 고민이었어요.

이러다가는 디자이너로 미래가 없다고 생각했죠."

IMF 외환위기로 있던 직장에서도 쫓겨나던 시절.잘나가던 그는 회사를 박차고 나와 후배 1명과 신사동에 4.7평짜리 매장을 열었다.

주변에서 미쳤다고 했다.

이후 배고픈 날들이 이어졌다.

"마네킹 2개에 행거 2개,책상 1개를 놓으면 꽉 찰 정도로 좁은 매장이었죠.한달 수입 중에서 월세 70만원을 내고 나면 50만원 정도 남았는데 둘이 25만원씩 나눠 갖곤 했어요.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꿈이 없었다면 견디기 힘든 상황이었죠."

#"중국 부자들에게 비싸게 팔아야죠"

정욱준은 인터뷰 내내 '인터내셔널'이란 말을 되풀이했다.

"'한국'이라는 틀 속에서 사고하는 패션은 얼마 못가서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에서 잘 팔리니까 해외에서도 잘 팔리겠지'라는 생각은 독(毒)과 같아요."그는 '아이덴티티(identity)'를 강조한다.

루이비통이 그렇듯이 이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디자인과 아이템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아이덴티티가 있는 브랜드,디자이너의 독창성이 녹아 있는 패션으로 해외에 진출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디자이너와 창의성'이란 주제로 잠시 얘기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럽게 교육문제로 화제가 옮아갔다.

정욱준은 "아이덴티티가 있는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서는 창조적인 디자이너가 많아야 한다"면서 "그런데 우리 교육 현실은 창조성과는 거리가 멀어 걱정"이라고 했다.

"한국 사람들은 예술적 기질이 뛰어 납니다.

그런데 그런 자질을 발휘하도록 돕는 교육이 없어요.

한국에선 꼭 대학을 나와야 디자이너로 성공할 수 있다는 공식이 있는데 패션이 발달된 나라의 디자이너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패션계에 투입됩니다.

그들보다 4∼5년 뒤늦게 시작하는데다 일도 창조적이지 못하니 경쟁이 되겠어요."

정욱준은 유럽에서 인정받은 뒤 중국에서 당당히 제값 받고 옷을 팔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번에 파리에서 첫발을 내디뎠죠.파리 뉴욕과 같은 본토에서 네임밸류를 얻은 다음 중국 부자들에게 비싸게 팔아야죠." 그는 중국 한 기업에서 높은 연봉과 숙소를 제공받고 디자인팀을 맡아 달라는 제의도 그래서 거절했다고 밝혔다.

특별취재팀=류시훈 기자 bada@hankyug.com

▶▶정욱준은

1967년 3월1일생

1991년 '에스모드 서울' 졸업

1991~1998년 쉬퐁,클럽모나코,닉스 디자인실 근무

1998년 영화 '유령' 의상디자인

1999년 디자이너 남성복 브랜드 '론 커스텀' 론칭

2001년 영화 '화산고' 의상디자인

2003년 아시아타임지 선정 아시아 4인의 아티스트

2006년 4월 06-07 F/W 서울 컬렉션 참가

2002~2007년 서울컬렉션 참가

2007년 '파리 2008 봄·여름 컬렉션' 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