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한국개발연구원(KDI)이 개최했던 중소기업 관련 국제회의에서 정책자금이나 보증보다 벤처캐피털(VC) 자금이 중소기업에 더 효과적이라는 주장이 나왔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리 없는 정부는 그 때 그 자리에서 2008년까지 이른바 혁신형 중소기업 3만개 육성론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1만개가 훨씬 넘는다는 벤처기업들 중 VC로부터 투자를 받은 곳은 얼마나 될까? 20% 내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통계치가 떠오른다. VC가 투자한 기업이 곧 벤처기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 들 것이다.

우리나라 VC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 건지,투자대상인 벤처기업들이 별로여서 그런 건지,아니면 정부 영향권하에 있는 이런저런 금융기관들이 생존 목적으로 벤처 쪽에서 발을 빼려 하지 않아서 그런 건지는 알 수 없다.

미국의 VC가 한국 투자를 확대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실제로 몇 가지 사례들을 들면서 시장규모 측면에서 중국이나 인도보다 주목을 받지 못했던 한국 기업들의 기술적 가능성을 미국 VC들이 인지하기 시작한 때문이란 분석까지 내놨다.

꼭 그게 아니어도 미국 VC가 밀려들 가능성은 분명 커지고 있다. 2000년 버블 붕괴 이후 감소세로 돌아섰던 미국 VC는 2003년 이후 증가 국면에 있고,지난 1분기 투자액은 5년 만에 최고수준이었다. 또 미국 VC의 해외투자 비중이 증가하면서 중국 인도 유럽 캐나다 멕시코 이스라엘 등으로 투자가 확대되는 중이다. 여기에 한·미 FTA까지 감안하면 여건은 과거와 크게 달라졌다.

미국 VC가 우리에게 득이 될지,해가 될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좋은 쪽으로 생각해 보면 국내 벤처 생태계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변수가 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우선 VC 자체가 그렇다. 국내 일부 VC는 고사하거나 흡수될수도 있겠지만 꼭 그렇게만 생각할 것은 아니다. 미국 VC들과 경쟁을 하거나 협력을 하다 보면 투자규모나 운용능력 측면에서 과거와 다른 경쟁력있는 VC들이 튀어 나올 확률도 분명히 있다.

또 싹이 보이는 벤처기업들은 더 많은 기회를 얻을 것이다. 미국 VC로서는 우리 정부가 벤처기업으로 인증했다고 해당 기업을 특별히 우대할 이유가 없다. 시장의 선별능력이 보다 중시될 것이고,자원배분은 그만큼 효율적으로 흐를 것이다.

게다가 미국 VC는 회수시장으로서 상장(IPO)만큼이나,아니 그보다 훨씬 더 선호하는 게 인수합병(M&A)이다. 국내 기업들의 M&A에 대한 잘못된 고정관념도 함께 바뀐다면 M&A가 더욱 활성화되고,기업의 성장경로가 다양해질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되면 VC 쪽으로 투자자들의 참여 또한 늘어날 것이다.

마지막으로 미국 VC의 유입은 정책금융,보증은 물론 정부의 직접적인 벤처투자를 시장에서 거꾸로 밀어내는 일종의 '역 구축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그리되면 정부정책 또한 근본적인 변화가 불가피해진다.

혹자는 이 모두 지나친 기대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미국 VC와 상관없이 벤처 생태계가 그렇게 변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강렬해서 그렇다.

안현실 논설위원·경영과학博 a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