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미술시장이 달아오르고 있다.

박수근 화백의 1950년대 후반 유화작품 '빨래터'(37×72cm)가 추정가 35억~45억원에 경매시장에 출품됐는가 하면 서울 인사동 청담동 등 화랑가에서는 고영훈 김형근 사석원 이왈종 이숙자 등 중견·신진 작가 작품값이 최근 1년 사이에 30~100%나 뛰었다.

일부 작가의 경우 작품을 얻기 위해 화랑 대표나 컬렉터가 수십명씩 대기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이에 따라 주문이 밀려드는 일부 작가의 작업실은 '미술공장'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미술계 일부에서는 비이성적 과열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미술품 경매회사 K옥션의 김순응 대표(54)는 "지난 10여년간 저평가된 작가들의 작품값이 회복되면서 시장이 뜨거워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1995년처럼 시장이 무너지는 일(hard landing)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최근의 미술시장 분위기는 과열이라기보다는 장기 호황을 위한 '통과의례'며 이 같은 상황은 앞으로 10여년간 더 지속될 것이라는 낙관론을 펴고 있다.

지난 4일 오전 서울 사간동 K옥션 사옥에서 김 대표를 만나 한국 미술시장의 전망과 미술품 투자에 대한 조언을 들어봤다.

-서울 화랑가에는 전시도 하기 전에 작품이 매진되는가 하면 미술품 경매 낙찰률이 90%를 웃도는 등 과열 조짐이 있습니다.

"5월3일 현재 유가증권시장에 상장된 1792개 기업의 시가총액은 무려 856조원이지만 국내 미술시장 규모는 겨우 3000억원 정도입니다.

국내 껌시장 규모(3200억원)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지요.

미술시장이 주식 부동산 등 투자자산 시장에 비해 워낙 '덩치'가 작다 보니 조금만 자금이 몰려도 작품가격이 급등하면서 '버블'현상이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지요.

실제 서울옥션과 K옥션 등 양대 미술경매회사의 지난 3월 경매에 216억원의 '뭉칫돈'이 들어왔어요.

두 회사의 지난해 낙찰총액이 600억원에 불과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한 자금이 몰린 것이지요.

그렇다고 요즘 미술시장을 거품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한국의 지난해 국내총생산(GDP) 규모는 848조원입니다.

이 같은 경제 규모라면 미술시장도 1조원은 돼야 합니다.

최근의 분위기는 경제력에 걸맞게 시장이 조성되는 과정이라고 보는 게 옳을 겁니다.

앞으로 일시적인 조정은 있을 수 있지만 1995년처럼 폭락사태는 없을 것입니다."

-최근 미술시장 호황의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무엇보다도 시중에 유동성이 풍부하기 때문이죠.정부의 부동산 규제가 강화되면서 고수익을 찾아 떠돌던 돈이 미술쪽으로 흘러들고 있습니다.

일부 상류층의 우아한 취미쯤으로 여겨졌던 미술품이 주식,부동산 등과 함께 투자 수단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셈이지요.

금융권에서도 투자자의 자산 포트폴리오 중 하나로 미술품을 포함시키는 추세니까요.

여기에다 미국을 비롯해 중국 중동 등 세계 미술시장의 호황도 국내 시장에 영향을 끼치고 있고요."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미술시장이 10여년간 호황을 누린 적이 있지요.

당시 '묻지마 투자'가 미술시장의 큰 부담으로 작용했고 결국 1995년 이후 '부메랑'으로 되돌아왔습니다.

"미술 시장은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호황을 누리다 깊은 불황에 빠졌어요.

당시 미술시장의 '큰손'이었던 일본 경제의 '거품'이 붕괴되면서 시장이 타격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최근 미술 시장의 엔진은 글로벌화됐다는 점에서 1990년대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중국뿐만 아니라 인도 러시아 중동 등 신흥 경제국가에서 부호들이 크게 늘면서 미술시장의 새로운 '큰손'으로 떠올랐어요.

또 경제성장 동력 역시 제조업이 이닌 '문화'를 토대로 한 정보기술(IT)로 바뀌었습니다."

-현재 미술시장의 호재와 악재는 무엇인가요.

"부동산 규제로 묶여 있는 장롱 속 자금이 미술시장으로 언제든지 들어올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기본여건은 좋은 상태입니다.

해외시장 호조,미술품 양도소득세 면제 등도 시장에 호재로 작용하고 있고요.

특히 소득 수준이 전반적으로 높아지면서 문화에 관심을 갖는 계층이 두터워지고 있어요.

직장인 주부 등 '개미투자자'들이 급속히 늘어나면서 미술작품에 대한 '식욕'이 왕성한 상황입니다.

다만 12월 대선 이후 부동산 규제 완화 가능성을 비롯해 경제 불안감,미술품 양도세 부과 우려 등은 악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술 투자에 관심이 있으면서도 선뜻 나서지 못하는 사람이 많던데요.

"미술품을 예술로만 바라보는 것은 구태의연한 생각입니다.

미술품은 잘만 사면 삶을 풍요롭게 해주고 자산 증식에 도움을 주지만 잘못 투자하면 적지 않은 손실이 따르게 마련이지요.

전문적인 분야라 자칫 감정에 휩쓸리거나 눈앞의 이득만 좇다 보면 낭패를 당하기 십상입니다.

미술품은 즐길 수 있어야 하고 동시에 적절한 투자수익도 올려야 한다는 점에서 좀 까다로운 투자 대상이라고 할까요.

아무튼 미술 투자도 주식·부동산처럼 시장원리와 흐름을 잘 짚어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미술품을 고르는 원칙 같은 게 있습니까.

"아날로그 시대에는 금과 부동산이 유망 투자 대상이었지만 디지털 시대엔 그림 조각 등 문화상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수밖에 없어요.

미술품은 단기 투자 상품이라기보다는 장기 가치투자 상품입니다.

미술에도 미래의 현금흐름과 경제적 가치 등 이것저것 꼼꼼히 따지는 '워런버핏형' 가치투자만이 수익을 낼 수 있다고 봅니다.

국내에는 5만여명의 화가가 만들어낸 작품만도 200만점이 넘어요.

이들 가운데 자신의 작품에 목숨을 거는 작가가 미래의 '블루칩' 작가라고 보면 틀림없을 겁니다."

-우리나라 미술시장이 커지려면 기업이 나서야 한다고 목소리가 미술계에서 나오던데요.

"미술시장에서 기업은 일종의 기관투자가입니다.

기업들이 미술에 미치는 영향이 큰데 우리나라의 경우 미국 일본 등 선진국과 달리 미술 투자에 큰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미술품이 기업의 이미지를 높이고 마케팅 투자나 자산관리 측면에서 얼마나 유용한지에 대한 인식이 덜 된 탓이지요.

미국 자동차보험회사인 '프로그레시브'의 피터 루이스 최고경영자는 회사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 고심하다가 '미술이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데 착안하고 주로 젊은 작가에 투자해 큰 돈을 벌기도 했어요.

기업들의 미술 투자가 시작되면 한국 미술시장은 본격적으로 커지게 될 겁니다."

-경매업체가 국내 미술시장을 '견인'해가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모회사인 화랑 소속 작가들만 띄운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K옥션(모회사 갤러리 현대)과 서울옥션(모회사 가나아트갤러리)이 관계 화랑들이 관리하는 작가의 작품만 올리고 가끔 '재고털이'도 한다는 소문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는 투자자들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봅니다.

작년에 컬렉터 김모씨(55)가 천경자씨 작품을 6000만원에 낙찰받은 적이 있어요.

그 작품값이 지금 2억원을 호가합니다.

투자가치가 없다면 6000만원이란 거금을 들여 작품을 샀겠어요.

또 갤러리 현대나 가나아트갤러리 만큼 좋은 작가를 발굴하고 육성해 온 화랑이 어디 있습니까.

그동안 보유한 작품을 팔다보니 재고털이처럼 보일 수 있지요."

김경갑 기자kkk10@hankyung.com

김순응 대표는 …

1953년 충북 진천 출생
경기고.성균관대.남가주대 MBA 졸업
1978년 한국투자금융 입사
1992년 하나은행 종합기획부장
2000년 하나은행 자금본부장
2001∼2004년 ㈜서울옥션 대표
2005~현재 K옥션 대표 겸 경매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