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여성 임원 A씨는 몇 년 전 여성으로선 드물게 인사담당 임원이 됐지만 1년 만에 IT(정보기술) 분야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인사 업무를 더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딱히 개인적으로 실수한 일은 없었다.

핵심 보직인 인사 파트에 여성 임원을 두는 데 대해 사내에선 물론 그룹에서도 말이 많았다는 후문이다.

여성 임원이 늘어나는 추세이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이들의 활동 반경은 제한적이다.

경영 전반에 참여하기보다는 대부분 전문성이 강조되는 특정 분야에 포진해 있는 경우가 많다.

국내 10대 그룹 여성 임원 가운데 오너 일가(6명)를 제외한 31명이 맡고 있는 업무를 살펴보면 IT나 BT(생명공학) 같은 첨단산업 관련 '기술 서비스 및 연구개발' 분야에 11명(35.5%)이 몰려 있다.

삼성그룹의 김유미(2차전지 개발)·윤심(인큐베이션 센터) 상무보, LG그룹의 류혜정(모바일커뮤니케이션 연구소)·조혜성(기술연구원 공정연구소)·설금희(비즈니스 솔루션)·이숙영(솔루션 사업본부 기술서비스) 상무,SK그룹의 윤송이(커뮤니케이션 인텔리전스 본부) 상무 등이 대표적이다.

설금희 LG CNS 상무는 이에 대해 "IT 등 첨단산업은 신생 분야인데다 기술 변화가 빨라 기존 제조업에 비해 남성의 기득권이 상대적으로 적다"고 설명했다.

법무(4명),마케팅(4명),디자인(3명),교육·연수(3명) 등도 여성 임원들이 두각을 나타내는 분야다.

이들 분야의 경우 업무상 '여성적' 섬세함이 요구되거나 그같은 특성이 장점이 될 수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반면 오너 일가를 제외하면 10대 그룹 내에서 경영 총괄이나 재무,인사 파트는 여성 임원이 한 명도 없다.

10대 그룹을 벗어나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주요 대기업 중에선 조화준 KTF 전무와 재미교포 출신인 제니스 리 하나로텔레콤 부사장이 CFO(최고재무책임자)로 활동하고 있는 정도다.

모 대기업의 여성 임원은 "어느 조직에서나 자금(재무)과 인사는 요직 중의 요직"이라며 "(이들 분야의 경우) 개인의 능력이나 전문성 못지않게 조직에 대한 한없는 충성도,대외적인 관계 등 모든 것이 고려사항이어서 상대적으로 여성들이 불리하다"고 지적했다.

한편 국내 기업의 전체 임원 중 여성 임원 비율도 외국 기업에 비해 턱없이 낮은 수준이다.

금융그룹인 리콜 등이 지난해 선진국 증시에 상장된 전 세계 3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여성 임원 비율은 9.3%였다.

북미 기업의 경우 이 비율이 15.6%에 달했다.

반면 국내 주요 그룹 대부분은 여성 임원 비율이 1%도 안된다.

여성 임원 비율이 가장 높은 LG그룹조차 2%를 조금 넘는 수준이다.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늘어나면서 기업들의 여성임원도 증가할 전망이지만 다른 부문보다 빠르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최근 '여성 리더 계층의 부상과 전망' 보고서에서 종업원 1000명 이상인 국내 중견·대기업의 여성 임원 비율은 현재 3.5%에서 5년 후인 2012년에는 5%로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에 반해 다른 부문의 경우 언론사 기자·논설위원(18%→30%),국회의원·지방의원(13%→28%),교수(18%→23%),판·검사·변호사(12%→22%),정부의 5급 이상 공무원(9.6%→15%) 등으로 여성 리더의 비율이 급속히 증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보고서는 고시나 자격증을 따 진출하는 분야와는 달리 대기업 임원이 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