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건(高 建) 전 국무총리가 16일 전격적으로 대선 불출마를 선언한 것은 상당히 오랜 고민의 결과물로 보인다.

고 전 총리는 지지율이 대폭 하락할 조짐을 보였던 지난해 말부터 불출마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게 측근들의 설명이다.

고 전 총리 본인도 이날 불출마 선언문에서 "저의 활동의 성과가 당초의 기대에 크게 못미친다는 여론의 평가를 겸허하게 받아들인다"면서 저조한 지지율을 불출마 결정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로 들었다.

고 전 총리의 측근들은 막판까지 `중도하차' 결심을 되돌리기 위해 향후 지지율이 대폭 반등할 수 있다는 여론조사 전문가들의 의견을 담은 보고서도 올렸지만, 고 전 총리는 "실제로 지지율을 올릴 대책은 없지 않느냐"며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특히 그는 지난해 10월 북한의 핵실험 이후 유권자들의 성향이 대폭 보수화됐다는 점에 상당히 낙담한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 대선까지 북핵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기 때문에 보수진영을 대표하는 한나라당 후보들이 절대적으로 유리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갖게 됐다는 것.
캠프의 한 인사는 "고 전 총리가 지난해 10월 북핵사태 이후 한나라당 이명박(李明博) 후보와의 격차가 벌어지는데 대해 상당히 불안해 했다"고 말했다.

정치권의 정계개편 논의가 지연된 것도 그의 불출마 결정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고 전 총리는 지난 10.26 재.보선 이후 열린우리당 내에서 정계개편론이 제기되자 11월2일 기자간담회를 자청해 "국민 대통합신당의 주춧돌이 되겠다"며 정계개편의 깃발을 들었다.

이후 고 전 총리는 2개월동안 국민통합신당 창당을 위한 원탁회의 구성을 목적으로 우리당과 민주당 인사들을 접촉했지만, 진전된 결과를 이끌어내지 못했다는게 측근들의 설명이다.

이 과정에서 고 전 총리는 정치권내 `친(親) 고건파'로 알려진 의원들에 대해 상당히 섭섭한 감정을 갖게 됐다는 후문이다.

"중도실용개혁세력의 대통합이라는 대의명분을 위해 함께 하자"고 여러차례 요청했지만, 대다수 의원들이 "당내 상황이 여의치 않다"고 거절했다는 것.
한 측근은 "정치인들의 말만 듣고 정계개편 작업에 뛰어든게 잘못이었다"며 "국회의원들은 고 전 총리의 지지율이 높았을 땐 50~60명씩 달려들더니, 지지율이 떨어지자 못본 척했다"고 `염량세태'에 혀를 찼다고 한다.

고 전 총리 스스로도 최근 "국회의원들은 내가 대선에서 떨어져도 자신들이 앞으로 계속 배지를 달 수 있게 5년간 애프터서비스를 받길 원한다"고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다는게 캠프측의 설명이다.

이런 답답한 상황에서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개헌 제안으로 정계개편 정국이 더욱 복잡해 진 것도 고 전 총리의 불출마 결심을 재촉한 것으로 보인다.

일부 인사들은 민주당 등 기존 정당에서 떨어져 나온 일부 세력과 함께 독자신당을 만들자고 건의했지만, 고 전 총리는 "대통합이 아닌 소통합 신당은 지역정당이라는 말 밖에 듣지 못한다"고 반대했다는 후문이다.

지난해 말 노 대통령의 `잘못된 인사' 발언으로 인한 `전무후무'한 공방도 고 전 총리에게 상당한 `흠결'을 남기면서 정치판에 회의를 갖게된 계기를 제공했다는 분석이다.

한 측근은 "고 전 총리가 노 대통령의 발언으로 상처를 많이 입었다"며 "평생 공직생활을 한 분인데, 정치에 발을 들여놨다는 이유로 대통령과 공방을 벌인데 상당히 침통해 했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고 전 총리 본인의 건강문제도 불출마 선언의 배경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확산된 `중병설' 루머대로 큰 병을 앓는 것은 아니지만, 몸이 정상 컨디션은 아니라는 것.
고 전 총리가 지난해 8월 희망연대 출범을 한차례 연기한 것도 몸의 이상 때문이었다는게 한 측근의 설명이다.

이런 가운데 가능성을 극히 낮지만 정치권 일각에선 고 전 총리의 불출마 선언이 전략적 후퇴일 가능성도 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지지도가 하락추세에 있고, 정계개편도 지지부진 상황인만큼 일단 불리한 국면을 피해 잠적한 뒤 새로운 틀이 짜여지면 재등장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
그러나 고 전 총리측은 "고 전 총리는 본인으로 인해 대선레이스가 왜곡돼선 안된다는 생각과 조금이라도 빨리 입장을 정리하는게 국민의 혼란을 줄일 것이라는 진실된 마음으로 불출마를 선언했다"며 "말 그대로 더 이상 정치는 안한다"고 말했다.

이날 지지자들의 반대로 기자회견을 하지 못한 고 전 총리는 수일간 지방에서 휴식을 취한뒤 상경할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연합뉴스) 고일환 기자 koma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