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움과 나눔을 넘어서'(정덕구 지음,21세기북스)는 한국 경제의 과거와 현재를 정치(精緻)하게 분석·진단하고 미래를 조망한 책이다.

외환위기 당시 외채협상 수석대표를 역임한 뒤 산업자원부 장관을 지내며 환란 극복과 경제 체질을 개선하기 위해 메스를 들었고 현직 국회의원이기도 한 저자의 이력을 접하면 언뜻 '다음 선거를 겨냥한 정치인의 홍보용 책'을 떠올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런 추측을 한 누구라도 책을 보는 순간 번지수를 한참 잘못 찾았음을 깨닫게 된다.

내용도 그렇지만 분량만 해도 600쪽에 가까운 하드커버 책이다.

한국의 경이적인 고도성장 50년사를 경제정책결정구조의 관점에서 바라본 분석틀은 이 책의 가치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박정희 정부 시기 제왕적 대통령을 정점으로 한 '정치권-관료-기업집단(재벌)'의 3각 경제정책결정구조가 확립되었으며 1980년대 이후 경제정책결정구조의 3각 축이 붕괴되고 세계화로 요약되는 대외환경의 급속한 변화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함으로써 외환위기가 초래되었다는 분석은 경제관료로 30여년간 봉직한 경험이 생생히 녹아든 통찰이다.

역대 대통령의 리더십과 경제정책관을 정리한 보론 역시 대통령과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한 그의 이력이 빛을 발한 결과다.

무엇보다 '키움과 나눔을 넘어서'가 그간 흔히 간과되고 폄하되어 왔던 관료에 대해 그 위상과 역할을 새롭게 '발견'하는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또한 외환위기 시기,내부 시스템의 문제가 누적되어 물이 위험수위로 높아지고 대외적으로 동남아의 외환위기가 태풍으로 밀려온 데다 수문 관리에 실패함으로써 댐이 붕괴된 것으로 비유한 양수리이론 같은 독특한 시각은 경제학자들의 무거운 책에서 보지 못한 재미를 준다.

저자는 한국의 경제상황을 '기존 질서가 붕괴되었으나 새로운 질서가 확립되지 않은 것'으로 본다.

또한 10여년 전의 외환위기가 다시 반복될 수도 있음을 우려한다.

키움(성장)과 나눔(분배)의 낡은 이분법적 갈등을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지배구조를 창출해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선진국 진입을 위한 청사진을 제시하는 데 저자가 책의 후반부 전체를 할애한 이유는 그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경제정책을 다루는 정치권과 행정관료,경제학자는 물론 대선캠프에서 일하게 될 정책설계자도 읽어둘 필요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지난 50년간의 한국 경제사를 독특한 분석틀로 정리하고 향후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미래설계를 밝힌 이 책을 읽고 난 뒤 뜨끔해 하는 '정통' 경제학자나 연구원들이 적지 않을 듯하다.

또한 이 정도 통찰과 부지런함과 필력이라면 외환위기에 관한 생생한 비망록을 담은 단행본을 하나 더 기대해도 좋을 거란 생각도 든다.

576쪽,2만3000원.

심상달 KDI공공투자관리센터 선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