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림동 대포집에서 한경 기자들과 4시간30분 솔직토크 ]

영업을 잘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말을 잘한다.

상대방 귀에 쏙쏙 들어오는 말들만 골라서 한다.

화제가 지루해질 만하면 기가 막히게 끊고 다른 얘기를 끄집어낸다.

박찬법 금호아시아나그룹 항공부문 부회장이 그랬다.

그렇다고 또박또박 받아적어야 할 '스타카토'가 모자라는 것도 아니었다.

청산유수 같은 이야기 속에 연륜의 무게를 느끼게 하는 금과옥조가 반짝이고 있었다.

박찬법 부회장은 월급쟁이 생활만 40년을 했다.

시쳇말로 복 받은 샐러리맨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젊은 시절 중동과 아프리카의 야시장을 누비며 겪었던 온갖 신산(辛酸)을 들어보면 그가 지닌 초로의 주름살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세상에 공짜는 없으며 저절로 되는 일도 없음을 느끼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금호 최고의 영업통'으로 통하는 박 부회장을 지난 5일 한국경제신문사 인근 작은 식당에서 저녁 7시30분부터 자정까지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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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엔 이런 대포집에 자주 안 오시죠?

"아주 오랜만이에요.

옛날엔 맨날 왔었는데….술도 많이 마셨지.요새 젊은 사람들은 우리 때만큼 술을 많이 먹지는 않는 것 같아.옛날엔 술 먹는 게 실력인 양 오기가 나서 안 지려고 많이 먹었지.나도 30도 넘는 독한 소주 한 병 이상은 마셨으니까.

요즘엔 소주 3분의 1병 정도밖에 못 먹어요."

오남수 사장(금호아시아나그룹 전략경영본부)도 부회장님에게 술을 배웠다고 하던데요.

"1980년대 초중반 미국에서 함께 근무했죠.미국 식당엔 '해피 아워'라고,9시 이전에 술을 주문하면 싸게 팔거든.퇴근 무렵 후배들 끌고가서 많이 마셨지.후배들은 나랑 눈 마주치지 않으려고 피해다녔어."

#직장생활에서 성공하려면…

직장 다니면서 승진을 많이 하셨는데 언제가 제일 기뻤나요.

"과장 됐을 때와 이사 됐을 때 제일 좋았지.과장은 3년 만에 됐으니 빠른 편이었지.그때 전혀 승진 기대를 안 해서 더 기뻤는지도 몰라.사실 사장 될 때는 어느 정도 예상도 했기 때문에 그때만큼은 못하더라고."

부회장님이 과장일 때와 비교하면 요즘 과장들은 많이 다르죠.

"옛날엔 허위의식일지는 모르지만 멸사봉공 정신이 강했어요.

요즘엔 그런 정신은 다소 부족한 것 같아요.

그게 맞는지도 모르죠."

스트레스는 많이 받는 편인가요.

"나는 항상 긍정적인 사고를 갖자고 말해요.

그래서 '근거 없는 낙관론자'란 질타도 많이 받지요.

하지만 외환위기 때처럼 모두가 비관적일 때 나마저 긍정론을 펴지 않으면 안 되겠더라고.어쩔 땐 근거가 희박해서 핀잔도 받았지만,근거 없기로 치면 신중론자도 마찬가지 아녜요.

나는 솔직히 비판적이고,냉소적이고,방관하는 사람이 신중론자인 양 대접받는 걸 보면 열 받아요.

부족하더라도 '된다'는 믿음으로 밀어붙이는 사람,또 '된다'며 주변을 독려하는 사람이 설령 속 없어 보일지라도 조직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작년에 부회장님이 외국인들에게 영어로 조크를 건네는 걸 봤어요.

"그건 그때 써먹으려고 미리 외웠던 거였어요(좌중 웃음).홍콩이랑 미국에서 11년 정도 근무를 하다 보니 자동적으로 입이 터졌지요.

한국 사람들이 왜 영어가 안 되는지 아세요? 부끄러워하기 때문이에요.

외국에 살면 별 수 없이 해야 되니까 입도 터지는 거죠.내 생각에 영어의 80~90%는 듣는 데 있어요.

못 알아들어도 자꾸 듣다보면 트여.정말 희한한 일이지.영어 중에도 제일 알아듣기 어려운 게 텍사스 등 남부 영어예요.

제가 처음 미국 주재원으로 갔을 때 남부 현지인과 전화로 거래를 했는데,겁이 날 정도였어요.

하지만 6개월 지나니까 어느날 갑자기 다 들리더라고요."

# '박찬법 청문회'를 열다

지금부터는 저희 기자들이 엄선한 질문 몇 가지를 드리겠습니다.

청문회라고 여기셔도 좋습니다.

우선 스스로 평가하기에 박 부회장님은 어떤 CEO(최고경영자)라고 생각하세요.

"아이고 나 같은 사람도 청문회에 부르나(웃음).스스로 평가하기는 뭣하지만 '어떤 CEO로 불리고 싶냐'고 묻는다면 '합리적인 CEO로 불리고 싶다'고 답할거예요.

날더러 '문약하다''카리스마가 부족하다'고 평하는 사람도 있어요.

나도 그걸 의식해요.

하지만 사실 이건 허망한 얘기거든.왜냐면 '전문경영인은 흘러가는 존재'라는 걸 모든 직원이 알기 때문이에요.

'전문경영인 믿고 영원토록 따라가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오너는 저절로 카리스마가 생기지만,전문경영인은 임직원들에게 '죽인다,살린다' 해봤자 '흘러가는 사람'일 뿐이에요.

그래서 전문경영인은 합리적이어야 해요.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명령하면 반기를 들 수가 없거든."

혹시 나의 존재가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질 기회를 박탈한다는 생각이 든 적은 없었나요.

"(심각한 표정으로)글쎄.내가 그들에게 방해가 된다면 (방해가) 안 되도록 해야겠죠.하지만 우리 그룹은 특정인 때문에 좋은 아이디어가 묵살되는 곳은 아니라고 생각되는데.요즘 나는 회장님과 임직원을 조율하는 코디네이터 역할을 하는 데 주력하고 있어요.

혹시라도 나 때문에 뜻을 못 펴는 일이 벌어진다면 '엄청난 사건'이지."

살아오시면서 큰 좌절이 있으셨다면.

"대학에 떨어졌을 때죠(박 부회장은 서울대 경영학과에 낙방한 뒤 후기로 경희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철 없던 그때는 모든 게 끝난 것처럼 느껴졌어요.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었는데….당시로서는 정말 충격이었죠."

스스로 삶에 점수를 매기신다면.

"글쎄.60점 정도.낙제를 간신히 면한 정도 아닐까.

그러나 부모로서는 80~90점 줘도 될 것 같은데.남편으로선 50점 정도나 되려나.

직장인으로선 보통은 될 것 같고."

박삼구 회장님과 관계는 어떠세요.

"오랫동안 모시다 보니 지금은 얼굴 표정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알아차릴 수 있어요.

부분을 듣고 전체 맥락을 이해한다는 점에선 특수관계라고 해도 되나? 하지만 보스는 언제나 긴장되는 존재예요.

때로는 무서운 존재지요(웃음)."

자녀 두 분이 모두 의사라고 하던데요.

"큰 놈이 아들이고,작은 놈이 딸인데 둘 다 어렸을 때 미국에서 오래 지내다 보니 영어는 아주 잘하죠.하지만 한국에 들어오니까 오히려 문제가 되더군요.

한국어를 잘 못하니까.

사실 그때 저만 먼저 한국에 귀국하고,아이들은 1년만 더 있다 왔으면 대학에 특례입학할 수 있었는데,그런 거 신경 안 썼거든.지들 애비도 서울대 안 나왔는데 뭐.지들 실력에 맞는 대학 가면 되겠거니 생각했죠.그런데 한 몇 년 헤매더니 둘 다 의대를 가더라고요."

자녀들이 어떤 직업을 가졌으면 하고 원하신 게 있나요.

"전혀.나는 직업이나 대학에 대해선 추천도,강요도 안 했어요.

그런 중요한 일은 자기 책임 하에 해야 되니까.

결혼 역시 알아서 하라고 했어요.

다만 연애의 가이드라인은 정해줬어요.

아들한테는 "학력,가문 다 필요 없다.

미국여자도 좋다.

다만 너그러운지만 꼭 살펴라"고 했고,딸에겐 "신의 있는 남자면 된다"고 했어요.

둘 다 연애 결혼했어요."

자녀들 결혼할 때 집은 사주셨나요.

"큰 아들이 1998년 1월에 결혼했는데,당시 분명히 얘기했어요.

출발부터 부모 도움으로 집 사는 건 용인할 수 없다고.혜화동에 24평짜리 전세를 9500만원에 얻어줬어요.

그렇게 4년을 살더니 스스로 집을 장만하더라고요."

손주들 용돈 많이 주세요.

"대중없죠.잔돈 없을 땐 1만원씩도 줘요.

얘들한테는 지갑이 잘 열려(웃음).손주들을 볼 때마다 '지구상에 이보다 더 아름다운 존재가 있을까'하는 생각을 해요.

내 자식을 낳을 때도 이렇게 좋지는 않았거든.'왜 그럴까' 한참 생각해봤지.결론은 아이들이 '맑은 영혼'을 가졌기 때문이란 거였어요.

그럼 35년여 전 내 자식을 낳았을 때는 왜 못 느꼈느냐? 그때는 나 자신이 '아름다움을 보는 눈'을 못 갖췄기 때문이었어.소위 '심미안'을 갖는 데 30년이 넘게 걸린거지."

# 나를 가르친 사람들은…

부모님으로부터는 어떤 가르침을 받았나요.

"나는 8살 때 아버지를 잃었어요.

대신 어머니 영향을 많이 받았죠.어머니는 내가 '애비 없는 자식'이라고 손가락질 받을까 걱정을 많이 하셨고,그에 바탕한 교육이 지금 제 생활의 근거가 됐어요.

제 어머니는 평소 '밥 잘먹는 놈이 효자'라고 말씀하셨어요.

'못 배운 어머니가 하는 말씀이려니' 하고 흘려들었지만 나이 들어보니 이게 무릎을 칠 만큼 만고의 진리더군요.

고민이 있어서건,입맛이 없어서건,건강이 나빠서건 밥을 안 먹으면 부모가 걱정하잖아요.

걱정 끼치지 않는 게 최고의 효도인 것 아시죠."

학창 시절에 감명을 준 은사가 있으세요.

"전남 법성중학교 다닐 때 선생님은 지금도 못 잊어요.

나를 높이 평가해 줬었거든.그 선생님은 계속 저에게 '넌 여기 있을 아이가 아니니 고등학교는 반드시 서울에서 다니라'고 했어요.

선생님이 숙직 근무하실 때는 꼭 나를 불러 영어를 가르쳐 주시곤 했죠."

# 나의 열정은 죽지 않았다

종합상사 시절 추억 좀 얘기해 주세요.

"1980년에 인도의 라지스탄 사막을 찾았어요.

거기 있는 석회석 광구를 조사하기 위해 국내 요업기술자와 함께 갔지.옛날 '시발 택시' 비슷한 차를 타고 갔는데 일을 끝내고 나오니까 금세 어두워지더라고.사막에선 헤드라이트는 무용지물이더군.한번 길을 잘못 드니까 찾을 수 없었어요.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30시간을 헤맸네.그때 마침 낙타를 탄 한 노인을 만나 겨우 사막을 빠져나왔죠.이것 말고도 다양한 에피소드가 있죠.상대방이 술 좋아하면 술로,춤 좋아하면 같이 춤추고 그랬으니까."

그 정도 열정이었다면 다른 길을 갔어도 성공했을 것 같은데요.

"모든 사람은 자의든 타의든 한 가지 길을 선택하게 되죠.나는 무역을,월급쟁이를 선택했던 겁니다.

그 선택을 성공적으로 만들려면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완벽한 포기' 외엔 다른 방법이 없어요.

내가 결혼한 지 36년이 됐는데,주변에서 그 정도면 성공했다고들 해요.

어떻게 가능했느냐.와이프를 선택하면서 '불특정 다수의 여인'을 포기했기 때문이에요.

이걸 '포기의 미학'이라고 하더군.사실 1975년께 중동이 한창 호황이었을 때 저도 '독립해볼까' 하는 유혹을 많이 받았어요.

중동사람들이 정에 약하기 때문에 내가 독립한 뒤 '물건 좀 사달라'고 하면 몇천만달러 수출은 간단했거든.'중소기업 오너가 돼서 돈을 버느냐'와 '대기업 전문경영인이 되느냐'를 놓고 고민하다 후자를 택한거죠."

올해 해외출장은 얼마나 가셨나요.

"계산 안 해봤는데.아마 직장생활의 40~50%는 해외에서 보낸 것 같네."

가끔 대한항공 등 다른 비행기도 타보세요.

"많이 타지요.

대한항공은 작년에 박성용 명예회장이 돌아가셨을 때 미국 LA에서 급거 귀국하느라 탔어요.

대한항공 승무원이 특별히 신경 쓰는 것 같데요(웃음).항공사 CEO가 되면 전 세계 항공기 1등석을 공짜로 탈 수 있어요.

국제관례예요.

그러니 승무원들도 저를 알아봤겠죠."

(박 부회장의 와이셔츠 주머니에 이목이 집중됐다) 거기 가득 담겨 있는게 뭐예요.

"(수첩과 종이뭉치를 꺼내들며)아.이거? 수첩이랑 전화번호부,그리고 숫자들이에요.

윗분이 회의 때 하신 말씀 받아적은 거예요.

숫자는 11월 말 현재 유가와 환율,회사의 예상실적,대차대조표 등이고.(수첩에는 한글 한자 영어가 뒤섞여 있다)."

빗도 있네요.

항상 갖고 다니세요.

"그럼.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언제나 단정해야 해요.

지저분하면 상대에게 실례가 되니까.

비즈니스 파트너를 만나기 전에 빗질하려고 갖고 다니는 겁니다."

골프 좋아하세요.

"그럼요.

잘치는 편은 못 되지만 주말 골프로 스트레스의 80~90%를 날려요.

육체적 스트레스보다는 정신적 스트레스가 풀리기 때문에 아주 좋아해요.

잘할 땐 70타대도 갔었는데 요즘엔 90타 정도 쳐요.

돈내기 하면 그것보다는 낫고(웃음)."

밤 12시가 가까웠습니다.

마무리 질문으로 '봉급쟁이로 장수하는 비결'을 여쭙고 싶습니다.

"남의 흉내만 잘내면 돼요.

성공한 사람들의 첫 번째 특징은 부지런하다는 거예요.

나도 천성은 게으른 편이지만 성공한 사람들 보고 후천적으로 부지런하려고 노력했어요.

요즘엔 밤 11~12시에 자서 새벽 5시30분쯤 일어나요.

성공한 사람들의 두 번째 특징은 순진할만큼 진지하다는 겁니다.

교활한 사람들은 일정기간 성공할지 몰라도 반드시 헛발질하게 돼 있지.성공은 장기적으로 이뤄지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