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리 라이퍼 미국 스탠퍼드대학 공대 교수 겸 디자인연구소장은 "창의성을 길러주지 못하는 지금의 학교는 차라리 해체해 버리는 것이 낫다"면서 "학교의 벽을 모두 허물어버리고,넓은 공간에서 자유롭게 팀을 이뤄 작업하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라이퍼 교수는 지난 8∼10일 서울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열린 글로벌 HR포럼 기간 중 김영세 이노디자인 사장과 대담을 갖고 디자인 전반에 대한 견해와 디자이너 교육의 방향,향후 디자인 트렌드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라이퍼 교수와 김 사장은 "뉴미디어와 멀티미디어가 디자인 트렌드를 주도할 것"이라면서 "상호작용성을 갖춘 디자인에 대해 학생들이 좀 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데 한목소리를 냈다.

○김영세 사장=한국에는 아직도 디자인은 단순히 '보기 좋은' 물건을 만드는 작업이라는 인식이 뿌리 깊게 남아 있다.

디자이너로 교육받았다 하더라도 디자이너로서 반드시 갖춰야 하는 호기심,사람들이 만족하지 못하는 부분을 찾아내는 관찰력과 상상력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좋은 디자이너가 갖춰야 하는 조건이 무엇이라고 보는가.

○래리 라이퍼 교수=현실에 대한 깊은 이해다.

모든 것은 현실에서 시작된다.

사실 디자인이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아침에 눈을 떠서 오늘 무엇을 할지 생각하는 것이 바로 하루를 디자인하는 일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했을 때 보통 사람들과 디자이너는 서로 다르게 접근한다.

평범한 사람들은 새로운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고 굳이 알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디자이너는 그것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다가가 이해하려고 든다.

○김 사장=동의한다.

디자이너는 자극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며 새로운 것에 대해 탐구하려는 경향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현재의 디자인 교육 방식은 학생들에게 이러한 역량을 충분히 길러주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많다.

○라이퍼 교수=지금의 디자인 교육은 다른 모든 학과와 마찬가지로 학생들에게 단순히 교수에게서 피동적으로 배우고,배운 내용을 기억하고,이를 다시 교수에게 확인받는 과정으로 구성돼 있다.

디자인 교육은 달라야 한다.

무엇보다도 학생 개개인에게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이들을 한 그룹으로 뭉뚱그리기보다 '그들이 누구인가? 그들은 서로 어떻게 다른가?'라고 질문하는 데서 교육이 시작돼야 한다.

○김 사장=하지만 1 대 1 수업이 아닌 이상 여러 사람을 동시에 디자이너로 가르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과제를 던져준다.

일리노이 대학에서 강의를 할 때 교실에 가득찬 학생들을 앞에 두고 이들에게 '다른 사람과 달라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문제인지 절실히 깨달았다.

지금의 디자인 교육은 완전히 새롭게 디자인돼야 한다.

○라이퍼 교수=그렇다.

'디자이너'라는 존재 자체를 새롭게 디자인해야 한다.

현재 한국을 비롯해 각국에서 이뤄지고 있는 디자이너 교육이라는 것은 학생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교육 과정에서 학생들을 모두 회색으로 칠해놓고 이들이 사회에 나가 빨강 파랑 노랑과 같은 다양한 색깔을 표출하기를 바라는 것은 코미디다.

운이 좋아야 가능한 일이다.

○김 사장=창의성은 개성에서 나온다.

개성은 독창성에서 나온다.

그리고 독창성은 정직한 자세에서 나온다.

남의 것과 비슷한 것을 만드는 데서 만족하는 개성 없는 사고방식으로는 창의성을 기대할 수 없다.

○라이퍼 교수=학교를 재디자인해야 한다.

조금 과격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학교를 해체(knock down)해야 할지도 모른다.

○김 사장=그러면 학교를 새롭게 구성하는 게 아니라 아예 새로 지어야 한다는 건가.

○라이퍼 교수=지금의 상황은 최악이다.

수많은 학생들이 창조적으로 될 여지를 아예 박탈당하고 있다.

생각도 느낌도 죽어버린다.

무엇보다 물리적 공간이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

벽을 전부 없애라.마치 건축가의 방처럼 만들어야 한다.

내 경험상으로는 어떠한 수업을 하더라도 벽은 필요하지 않다.

이는 디자인교육뿐만 아니라 역사나 철학 같은 다른 모든 수업에서도 마찬가지다.

물리적 공간은 그 안에 있는 사람의 가능성을 제한한다.

○김 사장=다른 사람들과 한 팀을 이뤄 작업하는 경험을 유도하는 것도 아주 중요하다.

디자이너는 근본적으로 팀 프로젝트를 수행해야 하는 사람이다.

순수미술을 하는 사람과 다른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재능 있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것은 작업 생산물의 질적 수준을 결정하는 중요한 조건이다.

○라이퍼 교수=그렇다.

특히 디자이너와 엔지니어 사이의 갭을 좁혀가야 한다.

예전에는 협동,협력한다는 뜻으로 'coordinating'이라는 단어를 많이 썼지만 지금은 'collaboration'이라는 단어를 주로 쓴다.

여기에는 아이디어를 함께 모은다는 뜻도 담겨 있다.

아주 멋진 단어 아닌가.

디자이너와 과학자는 협동에 대한 개념 자체가 다르다.

과학자들이 한 팀으로 일을 할 경우 이들은 '팀'이라는 조직 자체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다.

팀의 성격이 결과물에 큰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디자이너는 팀을 하나의 유기체로 여긴다.

내부 구성원 간에 대화를 많이 하고 생각을 공유할 때 가장 좋은 결과물을 낼 수 있다.

이런 점이 디자인 교육에 반영돼야 한다.

나는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스탠퍼드대학 공학부 내에 'D스쿨'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일종의 협동과정으로 공학 미학 철학 인문학 사회학 등 다양한 분야를 전공한 이들이 디자인을 주제로 모여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 것이다.

나는 이들의 시너지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또 나는 내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반드시 팀을 이뤄 작업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개개인의 능력에 대해 개별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 사장=고등교육의 문제 이전에 어린 학생들에게 디자이너로서의 재능을 일깨워줄 수 있는 경험을 줘야 한다는 것도 지적하고 싶다.

나는 16세에 그런 순간을 경험했다.

자주 몰려다니던 친구의 집에 놀러갔다가 어떤 외국 잡지를 우연히 집어 펼쳐봤는데 그 안에 아주 멋진 자동차와 가구,코카콜라병 등이 실려 있었다.

나는 그런 세계가 있는 줄조차 몰랐다.

마치 쿠데타가 일어난 것 같은 충격을 받고 미술,특히 디자인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부모님과 갈등을 빚긴 했지만 결국 원하는 것을 얻었고 지금 여기까지 왔다.

나는 만약 내가 그런 경험을 좀 더 일찍,5살이나 7살에 했더라면 어땠을까 종종 스스로 반문하곤 한다.

어린 나이에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발견하고 이를 계속할 기회를 갖는 것은 중요한 문제다.

○라이퍼 교수=좀 더 어린 나이에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너무 어렸을 때부터 영재교육을 하듯 할 필요는 없다.

당신도 나도 그렇게 시작하지 않았지만 지금 디자인과 관련된 일을 잘 하고 있지 않은가.

자기 재능을 발견하는 과정은 빙빙 에둘러가는 과정이다.

직선 패스를 따라가는 과정이 아니다.

오른쪽 왼쪽 앞쪽 뒤쪽으로 조금씩 움직여가다 결국 자신이 찾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학생들이 아예 자기 능력을 계발하고 성취를 이룰 수 있는 기회 자체를 박탈당하는 것은 큰 문제다.

몇 년 전에 한국디자인진흥원의 초청을 받아 한국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한국의 디자이너에 대한 수요와 공급이 완전히 불일치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미대 졸업생 중에 순수미술,시각디자인,패션디자인 전공자가 80%에 이르렀다.

지나치게 많은 숫자다.

반면 실제 기업에서는 제품 디자이너의 수요가 80%다.

이렇게 되면 졸업생들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김 사장=앞으로 세계 디자인 트렌드가 어떻게 변할 것이라고 보는가.

○라이퍼 교수=뉴미디어와 멀티미디어가 화두가 될 것이다.

앞으로의 기업 수요 측면에서 그렇다.

실제 내 주변에서 진행되고 있는 11개 프로젝트 중 10개가 뉴미디어와 관련된 것일 정도다.

카페 슈퍼마켓 자동차 헬스케어산업 등 모든 분야에서 상호작용성을 가진 뉴미디어를 도입하고 있다.

그러나 한 연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미국에서 디자인을 전공하고 있는 학생들 중 단 3%만이 이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낮은 수치다.

상호작용성을 갖춘 디자인에 대한 교육을 받은 사람이 거의 없다.

나는 '뉴미디어'라는 명칭 자체가 다소 잘못 붙여진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사용자에게 새로운 상호작용 가능성을 부여해 주는 것이 뉴미디어다.

새롭다는 것만으로는 뉴미디어가 아니다.

하지만 뉴미디어 자체를 주제로 디자인하는 것은 잘못된 접근이다.

어디까지나 사용자와 고객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그 제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이며 그 제품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봉사할 것인가다.


○김 사장=소비자들은 '혼자서,언제 어디서나'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을 원하고 있다.

개인화된 디지털 기기의 수요는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것이다.

○라이퍼 교수=상품을 디자인할 때 사용자가 이 상품을 '품위 있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중요한 이슈다.

예컨대 휴대폰은 사용자가 중요한 대화를 하는 자리에서도 마구 울려댄다.

사람으로 치자면 갑자기 사무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손을 잡아채 가는 것이다.

아주 무례한,품위 없는 기기인 셈이다.

소비자의 웰빙을 위한 디자인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

나는 공학을 전공한 엔지니어 출신이다.

한 번은 인공 팔을 원하는 소비자에게 팔을 만들어 준 일이 있었다.

그것은 너무나 못생겼고,아주 무거웠고,혐오스러웠다.

그는 결국 그 팔을 사용하지 못했다.

나는 그에게 어떤 것을 원하는지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나에게 '테니스를 칠 수 있는 팔을 다시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고 나는 아주 가볍고 단순한 팔을 다시 만들었다.

이 일로 사용자의 관점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김 사장=좋은 디자인의 목표는 세 가지라고 본다.

먼저 감정적 소구 능력을 갖춰야 한다.

보기 좋아야 한다는 말이다.

다음으로 사용하기 쉬워야 한다.

마지막으로 생산하기 쉬워야 한다.

'사용하기 쉽다'는 말은 아주 흔하게 쓰인다.

사람들은 흔히 상호 작용적 디자인이라는 말이 사용하기 쉽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 말이 그 말이다.

사용하기 쉽고 생산하기 쉬운 것이 바로 상호 작용적 디자인이며 이 둘이 모두 갖춰져야 한다.

사람들을 보다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디자이너가 해야 하는 일이다.

단순히 겉모양을 보기 좋게 하는 문제가 아니다.

모든 면에서 그들을 행복하게 해야 한다.

그러려면 생산 비용이 저렴해야 하고 생산 과정이 복잡하지 않아야 한다.

디자인 영역이 자꾸 분화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빠른 변화를 받아들이는 데 방해가 된다.

지금은 사람들의 라이프 스타일에 영향을 주는 모든 요소를 통합해 고려할 시점이다.

학교와 기업 모두 이 점을 고려해 디자이너를 양성해야 한다.

○라이퍼 교수=디자인 업계가 자신들만의 말을 자꾸 사용하는 것도 문제다.

일반인을 위해서라도 좀 더 쉬운 용어를 개발해야 한다.

○김 사장=마지막으로 디자인과 창조성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싶다.

나는 디자인이 팀 플레이라는 점에서 혼계영이라고 생각한다.

각각 배영 접영 평영 자유형을 잘하는 선수들이 팀을 구성해 경주하는 것과 비슷하다.

○라이퍼 교수=디자인은 새로운 수학이다.

어느 주제,어느 분야에라도 적용할 수 있으며 어느 곳에서나 필요하다.

디자이너들이 가진 창의성은 마치 마술처럼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상은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