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666년,연개소문이 죽자 고구려는 일대 혼란에 빠진다.

개소문의 유언에 따라 장자 '남생'이 막리지가 되었으나 '남건'과 '남산' 두 아우는 형을 불신하고 배척한다.

남건은 형이 국정파악을 위해 외곽 성을 순시할 때 기회를 잡아 평양을 장악하고 형을 공격한다.

남생은 아들 '헌성'을 당나라에 보내 구원을 요청한 뒤 아예 당에 투항해버린다.

그로부터 석 달 뒤 당은 대규모의 군사로 요동정벌을 강행한다.

투항한 적국의 실권자로부터 필요한 군사기밀과 고급정보를 모조리 입수한 당과 24년에 걸친 1인 철권통치의 공백으로 큰 충격과 혼란에 빠진 고구려,이 전쟁은 만 2년을 끌다가 서기 668년 9월 고구려 수도 평양성이 당군 장수 이적에게 함락되면서 막을 내린다.

고구려는 겉으로 당에 망했지만 실상은 자멸(自滅)에 가깝다.

권력자 자식들의 불화가 화근이 되어 결국 700년 사직을 한순간에 잃어버린 것이다.

고구려는 지리상 서쪽과 남쪽에 국경이 있었다.

서쪽은 중국으로 통하고 남쪽은 백제,신라와 접한다.

게다가 땅은 넓어도 쓸모없는 박토가 많아서 물산이 귀하고 살림이 궁핍했다.

이는 고구려뿐 아니라 말갈 여진 돌궐 몽골 등 주로 북방국가들이 역사적으로 호전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철기병을 기르고 무기를 갈아 때가 오면 주변국을 공격한다.

이들에겐 영토가 목적이기보다는 양식과 물자,아이를 낳아줄 여자가 필요했다.

고구려는 필요한 것을 구하기 위해 광개토대왕처럼 서쪽으로 진출하거나,그 아들 장수왕처럼 남쪽으로 내려오는 방법이 있었다.

서쪽을 치면 중국과,남쪽을 치면 백제나 신라와 전쟁이 일어났다.

중국의 왕조들은 고구려가 늘 골칫거리였다.

양광(수 양제)도 이세민(당 태종)도 그래서 기회만 닿으면 고구려를 치려고 군사를 일으켰다.

형제들의 내분 덕택으로 손쉽게 고구려를 차지한 당은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만들고 설인귀에게 군사 2만명을 주어 '검교안동도호'로 삼는다.

이는 고구려를 발판으로 백제 옛 땅과 더 나아가 신라까지도 차지하겠다는 7세기의 동북공정이었다.

만일 그 프로젝트가 성공했다면 우리는 지금 중국 사람이 되어 살아가고 있을지 모른다.

고구려 멸망은 당시 신라와 이미 망한 백제 땅의 유민들에게도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해방 이후 북한정권은 기회 있을 때마다 고구려 정통론을 줄기차게 주장해왔다.

신라가 외세를 등에 업고 동족인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켰으니 이를 폄훼하는 한편 자주적이고 용감했던 고구려 정신을 계승해 '자주통일'을 이루겠다고 공언했다.

이 주장의 학술적 근거는 '한일병합' 이전에 이미 나왔다.

항일 독립운동가이자 사학자인 단재 신채호는 1908년 신문에 연재한 '독사신론'이란 논설에서 '단군-부여-고구려'로 새로운 고대사 인식 체계를 제시하면서 신라의 삼국통일을 정면 비판했다.

그러나 단재가 이 글을 발표할 때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실제로 우리 국가가 주권을 상실한 시기였고,따라서 민족단합이 어느 때보다 절실했다.

이런 시대적 배경을 무시하고 무조건 단재사학을 추종하고 신봉한 결과,남한에서조차 그런 시각이 아직까지 활개를 치고 있으니 유감이 아닐 수 없다.

망한 나라에는 반드시 망한 이유가 있다.

고구려가 망한 표면적인 이유는 위에서 잠깐 언급한 대로지만,7세기 국제정세를 살펴보면 연개소문이 왜 한창 일어나는 당나라와 교류하고 화친하지 않았는지 오히려 궁금하다.

오늘날 북한은 여러 면에서 말년의 고구려 정권을 연상시킨다.

외교와 교류가 세계적인 대세와 조류를 이룬 글로벌 시대에 그들만 오로지 대립과 고립의 험로를 걷는 것도 그렇고,군사양성과 무기 제조에 사활을 거는 모양도 그렇고,1인 장기집권과 철권통치도 그렇고,사해 물류의 중심인 서방세계와 담을 쌓고 척을 지는 태도도 그렇다.

그건 독자(獨自)가 아니라 독단(獨斷)이다.

매년 국제사회의 원조를 호소하면서 굶어죽는 사람과 탈출난민을 양산하지만 근본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고구려와 꼭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중국과의 관계인데,그조차도 내막을 자세히 살펴보면 크게 다르지 않아서 걱정스럽다.

지금 중국은 당조(唐朝)가 일어나던 시기와 비슷하다.

공식적으로 13억 인구,비공식적으로 15억이 넘는 대식구가 경제활동에 뛰어들면서 소득격차와 분배의 불균형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다. 당황한 중국 정부는 급격히 보수화로 돌아섰고,안으로는 유교사상의 부활과 충효를 강조하면서 밖으로는 서방에 대응한다는 명분으로 패권주의를 도모하고 나섰다.

개혁개방의 시장경제 기조는 계속되겠지만 교육과 이념만이라도 전통을 좇아 국민을 고분고분하게 만들겠다는 의도다.

역사적으로 보수정권들은 내치(內治)를 위해 외부에 적이나 대항세력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특징이 있다. 실은 중국뿐 아니라 이즈음 우리 주변국의 조류가 그렇다.

일본 총리의 신사참배와 독도분쟁,미국 부시의 호전적인 패권주의와 더불어 중국이 한창 몰두하는 동북공정,서남공정,서북공정,단대공정 등의 역사관련 프로젝트들도 모두 같은 맥락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더구나 중국은 1961년에 북한과 체결한 '조·중 상호원조조약'에 따라 한반도 유사 시 막대한 군사력을 즉각 북한에 투입할 권리를 갖고 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때는 말할 것도 없고,북한정권이 말년의 고구려처럼 스스로 내분에 빠져 자멸할 경우에도 우선권은 중국에 있다.

이럴 경우 북한은 그들이 추종해 온 고구려의 전철을 고스란히 밟아 중국 영토가 돼버릴 공산이 크다.

호시탐탐 동족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하던 북한이 역설적으로 국토와 민족을 중국에 넘길 심각한 위기에 처한 꼴이다.

그럼에도 북한은 이미 백두산까지 중국에 갖다바쳤고,중국은 고구려사를 자신들의 변방사에 편입시키면서 유사 시 한강 이북을 차지할 역사적 근거를 마련하는 일에 전력을 쏟고 있다.

동북공정의 검은 실체가 드러난 뒤에도 항의 한 마디 하지 못하는 게 기회 있을 때마다 자주와 주체를 표방해 온 북한정권의 실체다.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고 당에 투항한 남생의 경우와 과히 다를 바가 없다는 얘기다.

7세기 중반과 21세기 초반의 한반도 상황 전체가 여러 모로 매우 유사하다.

신라가 당과 동맹한 일은 현재 우리와 미국의 관계처럼 외세를 끌어들였다고 볼 수 없다.

강대국과 화친하고 교류하는 일이 잘못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고구려가 공중분해 된 뒤 이 땅에서 당의 야욕을 물리치고 8년간 결사항전을 벌이며 국토와 민족을 지켜낸 신라와 신라사를 깊이 있게 연구해야 할 시점이다.

역사는 유행처럼 돌고 돈다.

국제정세에 둔감한 독불장군 집단은 고금을 막론하고 역사에서 사라지게 마련이다.

최근에는 중국과 미국의 수뇌부도 북한 이후를 염두에 두고 여러 대책을 강구하는 분위기다.

중국의 음흉한 역사 프로젝트와 북한정권의 위기가 빚어내는 위태로운 역학관계엔 우리 민족 전체의 사활이 걸려 있다.

북한에 내분이라도 일어나면 바로 고구려의 재판이 되면서 중국이 밀고 들어올 것이다.

그것이 더욱 걱정된다.

김정산 작가 / 대하소설 '삼한지'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