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자금 수사 때 `총대'를 멨던 김동진 현대차 부회장이 비자금 조성과 경영권 편법승계 지시 의혹을 받고 있는 정몽구 회장 소환이 임박한 상황에서 검찰에 불려 나왔다.

김 부회장의 소환은 `모르쇠'로 일관할 수도 있는 정 회장이 꼼짝달싹 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한 `빗장 채우기'의 일환으로 분석된다.

채동욱 대검 수사기획관은 18일 "정 회장과 아들인 정의선 사장 소환 준비에 들어갔다.

조사할 양이 많기 때문에 신문 사항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혀 정 회장의 `자백'을 끌어내기 위한 막판 작업을 진행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 '모르쇠' 차단용 빗장 채우기

검찰이 이번 수사에서 적발한 현대차그룹의 범죄 혐의는 크게 비자금 조성, 경영권 편법승계 등 기업비리, 부채탕감 로비 등 세 가지이다.

검찰은 김 부회장을 상대로 불법행위에 대한 정 회장과 정 사장의 지시가 있었는지를 집중 추궁할 것으로 예상된다.

현대차 비자금 조성ㆍ집행이 분담체제로 이뤄진 상황에서 정 회장 부자가 `모르쇠'로 일관하면 총수 일가는 책임을 면하고 임원진만 대거 구속될 가능성을 피하기 위해 정 회장 부자의 범죄 혐의를 입증할 진술을 확보하기 위한 절차다.

정 회장은 17일 오전 중국으로 출국하며 비자금 조성 및 부채탕감 로비 의혹에 대해 "나는 도대체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다"며 발뺌하는 태도로 일관해 검찰에 출석하더라도 혐의를 순순히 인정하지 않을 것임을 엿보게 했다.

검찰이 정 회장 부자의 소환에 앞서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을 원천봉쇄하려는 데는 대선자금 수사 당시 악몽도 한몫했다.

현대차가 대선을 앞두고 100억원이 넘는 돈을 정치권에 전달한 사실을 확인하고도 김동진 부회장이 `총대'를 메는 바람에 정 회장을 사법처리하지 못한 `쓰디쓴 기억'이 검찰에 남아 있다.

이 때문에 검찰은 현대차 임원이 총수 일가를 대신해 책임을 지는 상황이 재연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정 회장의 귀국을 하루 앞두고 최측근인 김 부회장을 소환하는 강수를 뜬 것이다.

수사팀 관계잔는 "조사가 잘 됐다"고 밝혀 김 부회장을 상대로 의미있는 진술을 대거 확보했음을 내비쳤다.

◇MK 부자 사법처리 가시화

현대차 비자금 사건은 금융브로커 김재록씨 수사과정에서 튀어나온 `가지'의 하나였지만 수사가 진행될수록 범죄 혐의가 눈덩이처럼 커져 새로운 줄기가 됐다.

검찰은 정몽구 회장의 경영권을 외아들인 정의선 기아차 사장에게 넘겨주기 위해 다양한 불법행위가 시도된 단서들이 무더기로 포착되자 김재록 로비 의혹은 일단 제쳐놓고 수사역량을 부의 대물림 쪽에 집중한 것이다.

채 수사기획관은 "회사를 이용한 부(富)의 축적, 이런 부분이 적법하게 이뤄져야 우리나라도 투명해진다"고 밝혀 재벌 2세들의 경영권 편법 승계를 엄단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기도 했다.

재벌이 수백억원대 비자금을 불법으로 조성해 경영권 승계를 위한 `실탄'으로 쓰는 비리 구조를 근절하겠다는 것이다.

검찰의 이런 의지는 곧바로 구체화됐다.

이주은 글로비스 사장이 구속기소됐는가 하면 부사장인 김승년 구매총괄본부장과 이정대 재경본부장이 체포돼 조사받고 사법처리 절차만 남겨뒀다.

채양기 기획총괄본부 사장과 전임자인 정순원 로템 부회장, 이일장ㆍ주영섭 현대오토넷 전현직 사장도 연일 검찰에 불려다니며 조사를 받았다.

이주은 사장에 이어 현대차 그룹 임직원들이 잇따라 구속될 것이란 예상을 뒤엎고 사법처리가 유보되자 수사팀이 이들로부터 기대 이상의 성과를 얻었을 것이란 소문이 검찰 주변에서 나돌고 있다.

정 회장의 `심복'들이 비자금 조성을 누가 지시했는지, 해당 임원들은 어떤 역할을 했는지, 비자금은 어디에 쓰였는지를 자백했을 것이라는 관측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검찰이 정 회장의 귀국을 하루 앞두고 김 부회장을 소환한 것은 단순한 요식절차로 정 회장 부자를 압박하기 위한 카드일 것이란 분석도 있다.

(서울연합뉴스) 심규석 기자 ks@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