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원은 임시직원?…올 정기인사때 해임사유 가지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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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0일 서울 태평로 삼성본관은 담배 연기로 가득찼다. 건물 전체가 금연빌딩이지만 이날 만큼은 예외였다. 100명이 넘는 임원에게 '해임 통지서'가 날아들었기 때문.
삼성의 한 임원은 "매년 이맘 때마다 되풀이 되는 씁쓸한 풍경으로 사약을 받아든 기분"이라고 말했다. 짐을 정리하는 동료를 볼 때마다 '임원은 임시직원의 줄임말'이란 우스갯소리를 실감하게 된다는 것이다.
해마다 정기인사 시즌이 다가오면 각 기업의 임원들은 좌불안석이다. '기업의 별'로 불릴 정도로 명예와 두둑한 연봉이 주어지는 임원 자리도 실적이 받쳐주지 않으면 유지할 수 없다. 올 인사 시즌에서도 수백명의 대기업 임원이 억대 연봉과 고급 승용차를 반납해야 했다.
자리를 떠나는 임원들의 사연도 갖가지다. 실적 부진만이 전부는 아니다. 원만하지 못한 대인관계와 사생활이 원인이 되기도 한다. '때를 못 만나서' 또는 '운이 없어서' 야인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있다. 임원으로 장수하기 위해선 실력 뿐만 아니라 조직문화에 맞는 품성과 철저한 자기관리,그리고 운도 따라줘야 한다는 얘기다.
◆수신제가(修身齊家)는 기본
A사의 K씨는 부인의 의류 사업이 실패하면서 '별' 배지를 내놓았다. '카드 돌려막기'를 할 정도로 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난 사실이 회사에 알려진 탓이다. "재정상태가 갑작스럽게 취약해진 임원은 협력업체 등과 유착해 부정을 저지를 가능성이 높다"는 게 해고 사유였다.
B사의 H씨는 성희롱 혐의(?)로 자리를 떠나야 했다. 여비서에게 신체적 접촉을 시도했던 사실이 노조를 통해 공론화됐기 때문이다. C기업 회장 비서실 소속으로 '잘 나가던' 실세 임원 C씨는 법인카드를 개인용도로 사용한 게 적발돼 해고됐다.
◆지나친 '자기 과시'는 금물
D사의 L씨는 남다른 추진력으로 촉망받는 인물이었으나 지나친 과시욕 때문에 중도하차했다. "이명박 서울시장이 청계천 복원 등을 강력하게 밀어붙여 성공시킨 것처럼 나도 할 것이다. 나는 이 회사의 이명박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라고 말한 게 윗 분들의 귀에 흘러들어간 일이 화근이 됐다.
E사의 O씨는 자신의 원칙에 반할 때 타협하지 않는 성격 탓에 야인으로 돌아갔다. 회사 현안에 대해 회장과 다른 의견을 낸 그는 "자꾸 그러려면 사표 쓰라"는 말에 그대로 사표를 썼다고.
◆때를 잘 못 만나서…
화섬업체 G사의 K씨는 때를 잘못 만나 옷을 벗었다. 화섬 경기가 최악이던 1년여 전 부가가치가 높다고 알려진 제품에 투자를 감행했지만,이 제품마저 공급과잉으로 적자로 돌아서자 해고된 것. K씨는 지난 몇 년간 화섬경기 침체로 동료 임원들이 하나 둘씩 회사를 떠나는 동안에도 꿋꿋이 회사를 지킬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던 인물. 직원들은 "한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화섬산업에서 돌파구를 마련하려 시도한 것만으로도 평가받을 만한 것 아니냐. K씨는 침체일로에 빠진 화섬산업의 희생양이 된 것"이라고 말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
H사의 Y씨는 원수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케이스다. 영업쪽에서 탁월한 실력을 발휘했던 Y씨는 5년 전 총무부서로 옮긴 뒤 상급 임원의 눈 밖에 나 쉽지 않은 임원생활을 했다. 조직 관리는 뒤로한 채 '개인 플레이'에 치중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후 Y씨는 영업부서로 컴백했고,좋은 실적을 올려 잘 나간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총무부서 근무 당시의 상급 임원이 영업부서 최고책임자로 부임하면서 5년 전 상황이 재현됐다. 그 최고책임자는 "조직에 누를 끼칠 사람"이라며 Y씨를 내쳤다.
◆줄서기는 오래 못가
G업체는 최고경영자(CEO)가 바뀌면서 그를 따르던 10여명의 임원들이 한꺼번에 물갈이 됐다. 실적부진에 따른 책임을 묻는 것이자 임원진 교체를 통해 회사에 새로운 활력을 넣겠다는 게 이유였다.
H기업 역시 외국기업에 인수된 뒤 사장을 포함한 경영진이 최근 거의 대부분 교체됐다. 인수한 외국기업이 친정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끈끈하게 맺어진 기존 경영진의 인맥을 없앤 것이다.
오상헌 기자 oh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