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전 사건이 지금도 따라다니네요. 작년 4월 10년 만의 컴백 때도 입을 다물었어지만 제 입으로 그 오해를 풀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새해 출발선에 섰을 때 저도 그곳에 함께 서고 싶습니다." 지난달 31일 오후 5시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1980~90년대를 풍미한 그룹 소방차의 이상원(44)이 6년 전 사건에 대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2000년 6월 그는 20대 여성 강간치상 혐의로 입건됐다. 그러나 이 사건은 '혐의없음' 판결을 받았고, 치상 혐의에 대해 약식 기소돼 25만원의 벌금형으로 종료됐다. 작년 소방차가 2인조(김태형, 이상원)로 컴백할 때도 그는 이 사건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 6년 전 서울지방검찰청에서 발부한 낡은 벌금 영수증을 꺼내보인 그는 "소방차의 명예에 오점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컴백 당시 주위에서도 말렸고 (김)태형이에게 피해가 가는 걸 원치 않아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고 말했다. 지금 이 시점에 왜 그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져가는 과거 사건을 다시 끄집어내는지 궁금했다. 이 얘기를 하겠다고 마음 먹은 그는 여러 날 밤잠을 설쳤다고 했다. 과연 사람들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수백, 수천번 고민하다 결자해지(結者解之)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작년 11월부터 소방차가 개별 활동을 시작해 혼자서 쇼ㆍ오락 프로그램에 많이 출연했어요. 제 앞에선 웃지만 뒤돌아서면 간접적으로 들려오는 후배 가수와 방송관계자들의 쑥덕임, 방송 출연 때마다 범법자로 내모는 네티즌의 입에 담지 못할 악성리플에 자살이라는 걸 처음으로 생각해봤습니다. 입건 때는 언론들이 앞다투어 보도했지만 판결은 보도도 거의 안됐어요. 더이상 오해받고 싶지 않고 이젠 정말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어 용기를 냈습니다." 이 사건 직후인 2001년 초 그는 지인이 있는 러시아로 훌쩍 떠났다. 인근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지까지 떠돌며 마음을 다스렸다고 한다. 이곳에서 우울증, 피해망상증, 대인기피증에 시달렸지만 옆을 지켜준 지인들이 큰 힘이 됐다고도 했다. 복귀는 꿈도 꾸지 않았다. 이때 김태형이 이상원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러시아에서 살 거 아니면 돌아와서 같이 소방차로 활동하자"고. 2004년 말 귀국한 그는 비밀리에 소방차 녹음 작업을 했다. 이상원은 작년 봄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약속을 못 지켜 무척 한스러워 했다. "죽기 전 방송하는 걸 보고 싶다. 언제 TV에 다시 나오냐"며 아들의 복귀 무대를 손꼽아 기다리던 아버지는 소방차의 컴백 첫 방송 일주일 전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 역시 현재 인공심장에 의지하며 투병중이어서 그는 요즘 병실을 지키고 있다. "지금도 어떤 무대에 서든 '아버지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하고 올라가요. 투병중인 노모에게 불효한 것 같아 죄송할 따름이죠. 다시 활동하게 된 것만으로도 하루하루를 감사하며 살아요. 그 누가 비웃고 돌을 던져도 소방차 본연의 이미지만은 회복하고 싶네요." 앞으론 한 우물만 팔 생각이란다. 한때 음반 제작에도 손댔지만 본인도 나이가 든 만큼 세대에 맞는 음악으로 단 한명의 팬이 있을 때까지 가수로서 활동하고 싶다고 한다. 그는 87년 소방차의 '어젯밤 이야기'로 데뷔해 89년까지 활동하다 탈퇴(대신 도건우가 멤버로 합류)했다. 90년 솔로로 전향한 뒤 홍콩으로 건너가 3년간 장쉐여우(張學友) 등 인기 배우들과 7편의 홍콩 영화에 출연했다. 92~94년 2인조 그룹 잉크로 활동했고 95년 'G카페'와 함께 소방차로 복귀했다. 98년 말 소방차 해체 후 정원관, 김태형은 음반제작자로 돌아섰고 그는 2000년 사건 후 대중의 곁을 떠나 있었다. "격려와 사랑은 바라지도 않아요. 용기를 낸 만큼 이젠 마음의 문을 열고 세상과 소통하고 싶네요. 6년간 위축됐던 삶에서 벗어나 앞으로 더 열심히 활동하고 싶습니다." 이상원은 이 말을 수차례 되뇌었다. (서울=연합뉴스) 이은정 기자 mimi@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