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러들은 지금의 외환당국을 역대 최약체라고 평가합니다." 한 시중은행 딜러는 요즘 외환당국의 '엄포'가 약발을 받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구태를 답습하는 외환당국의 전략이 이젠 훤하게 보인다는 얘기다. 환율 방어 능력에 의문 부호를 다는 시각도 적지 않다. 불과 한두 해 전 물불 안 가린 개입이 성과는커녕 여론의 지탄만 받았던 사실을 생생히 기억한다. 환율 세 자리 시대가 불가피하다는 전망이 제기되면서 이제는 외환 정책도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일정 수준에 환율 방어선을 치고 구두 개입과 달러화 매수 개입을 반복하는 종전 전략으로는 외환시장의 불안감만 증폭시킨다는 지적이다. 개입 방식과 타이밍도 어설프다는 게 시장 참여자들의 평가다. 외환시장은 '세자릿수 시대'에 접어들었는데 외환 정책은 여전히 '네자릿수 시대'에 묶여 있는 셈이다. ◆외환정책 업그레이드해야 외환시장 전문가들은 외환 정책의 전반적인 수정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입을 모은다. 박춘호 홍콩 심플렉스 한국 대표는 "본떼를 보여주겠다는 식의 정책은 더 이상 약효가 없을 것"이라며 "정확한 현실 인식과 인과 관계가 명확한 정책 수단만 외환시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꼬집었다. 환율이 급락할 때마다 허둥지둥 각종 개입 수단을 동원하는 것도 지양해야 할 대목으로 꼽혔다. 개입 타이밍이 엇나가 괜히 힘만 빼는 경우가 많다는 진단이다. 외국계 은행 딜러는 "지난 3일 당국은 1000원 선을 사수하기 위해 모처럼 6억~8억달러를 쏟아붓는 강력한 직접 개입을 단행했지만 조급한 마음이 앞서는 바람에 효과가 반감됐다"고 설명했다. 그날 밤 미국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의사록 공개가 예정돼 있어 이튿날 외환시장이 요동칠 게 뻔한 데도 무리한 개입을 했다는 얘기다. 결국 4일 원·달러 환율은 세자릿수로 가라앉고 말았다. 당국이 여전히 '스무딩 오퍼레이션(미세 조정)'을 강조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국내 은행 관계자는 "스무딩 오퍼레이션이란 말 자체가 환율 하락은 용인하되 속도만 조절하겠다는 것인데 그런 상황에서 누가 달러화를 사려고 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인프라부터 구축해야 대증(對症)적인 개입 정책에 앞서 환율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인프라부터 구축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우선 유로화 위안화 등이 직거래될 수 있는 이종통화 시장을 개설하고 활성화해야 한다. 이진우 농협선물 금융공학 실장은 "다양한 이종 통화가 거래되는 시장이 활발하게 움직이면 원·달러 환율에 미치는 압력도 분산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현재 달러화를 제외한 이종통화 가운데 엔화의 직거래 시장만 개설돼 있다. 그나마 찾는 사람이 거의 없어 간판만 걸어놓은 상태다. 이종통화 직거래 시장이 살아나면 달러화 일변도인 기업들의 외환관리 풍토도 점차 개선될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상하고 있다. 투기 세력들의 영항력을 줄일 수 있는 장치 마련도 시급하다. 김정식 연세대 교수(경제학)는 "조기 경보체제 구축 및 인접국과의 공조채널 확보를 통해 외국 자본의 성격을 철저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시장 참여자들이 외화를 운용할 때 참고할 수 있는 지표도 다양화해야 한다. 이효근 대우증권 선임 연구위원은 "대부분 시장 참여자들이 엔·달러 환율만을 참고 지표로 활용하기 때문에 이번처럼 엔·달러 환율이 급락하면 원·달러 환율도 덩달아 추락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환율 하락,반드시 막아야 하나 '환율 하락=경제 위기'라는 등식부터 깨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환율이 내려가면 내수가 살아나고 물가와 체감경기가 개선되는 등의 긍정적인 효과도 적지 않다는 견해다. 일정 환율 레벨을 반드시 사수해야 할 목표로 삼는 지금의 외환 정책은 재고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적절히 대응하기만 하면 산업 구조를 고도화하는 계기로 삼을 수도 있다. 이재웅 성균관대 교수(경제학)는 "환율 급락과 같은 위기를 오히려 경제를 회생시키는 구조 개혁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며 "일본 경제가 기술 혁신과 생산성 향상으로 '엔고(高) 현상'을 극복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고 말했다. 한상춘 논설·전문위원 안재석 기자 sc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