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12월 고용지표 부진으로 엔·달러 환율이 급락세를 보이자 해외 투자은행 등 역외 세력들이 9일 서울 외환시장 개장과 동시에 대규모 달러화 매도 공세를 재개한 영향이 컸다.
특히 이날은 일부 수출업체들이 980원을 기준점으로 외국계 은행들과 체결한 '녹아웃 옵션(knock-out option)' 관련 달러화 매물이 대량으로 쏟아져 나오면서 환율 하락을 부추겼다.
◆엔·달러 폭락이 도화선
이날 원·달러 환율은 개장과 동시에 12원가량 수직 하락했다.
외환당국이 미처 손써 볼 겨를도 없었다.
외환시장 관계자들은 "역외 세력들이 개장 10분이 채 안 돼 오늘 하루 매도 물량의 대부분을 처분했다"고 전했다.
이날 장 초반 환율 급락은 어느 정도 예견됐었다.
미국 12월 비농업 부문 취업자 수가 10만8000명 증가,월가 예상치(20만5000명)를 크게 밑돈 영향으로 지난 주말 엔·달러 환율이 113엔대까지 급락했기 때문.이 여파로 국내 원·달러 환율의 선행지표 성격을 띠는 차액결제선물환(NDF) 원·달러 1개월물 환율도 서울 환시의 지난 주말 현물환 종가(988원10전)보다 4원85전가량 낮아진 983원25전에 마감됐다.
◆'녹아웃 옵션'도 한몫
수출업체들의 달러화 동반 매도도 환율 하락을 부채질했다.
장 초반 역외 세력들이 환율 하락의 '불씨'를 제공하면 수출업체들의 네고 물량(달러화 환전 수요)이 '기름'을 끼얹어 불씨를 키우는 형국이 지속된 것.
특히 이날은 수출업체들이 일부 해외 투자은행과 맺은 '녹아웃 옵션' 계약이 환율 하락을 가속화했다.
녹아웃 옵션이란 계약기간 원·달러 환율이 일정 기준점을 한 번이라도 밑돌게 되면 계약 자체가 무효화되는 외환파생 상품의 일종으로 작년 하반기 국내 일부 수출업체들이 환위험 헤지를 위해 외국계 은행들과 980원을 기준점으로 이 계약을 체결한 것으로 알려졌다.
외환시장 관계자는 "환율이 980원 밑으로 떨어지자 녹아웃 옵션을 체결했던 수출 업체들은 다시 환위험에 노출됐고 이로 인해 업체들이 원·달러 선물환을 급하게 매도해 환율 하락을 부추겼다"고 설명했다.
서울 환시의 옵션 딜러들은 이날 980원에 걸린 녹아웃 옵션 관련 연계 매물이 무려 10억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했다.
서울 외환시장 일평균 거래량(약 40억달러 중반대)의 20%에 해당하는 규모다.
◆시름 깊어지는 외환당국
원·달러 환율이 연일 급락하자 당국의 고민도 커지고 있다.
구두 개입,중·장기 외환유출 촉진책,달러화 매수 개입 등 모든 수단을 동원했지만 하락세가 멈추지 않고 있어서다.
외환당국은 이날 오전 환율이 급락하자 약 5억달러 규모의 매수 개입을 전격 단행, 한때 980원 선을 회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역외 세력들의 매도세 지속과 일부 수출업체들의 '고점 매도' 전략으로 980원 선은 다시 무너졌다.
그러자 권태균 재정경제부 국제금융국장이 "(당국의 시장개입 여부는) 시장을 잘 지켜보면 알게 될 것"이라며 구두 개입에 나섰다.
그러나 당국의 이 같은 조치들도 별 효력을 발휘하지는 못했고 결국 980원 선 사수에 실패했다.
이진우 농협 금융공학 실장은 "당국의 개입 의지가 그다지 강력하지 않은 데다 주변 여건도 우호적이지 않다"며 "이런 상황에서 누가 자신 있게 환율 상승에 베팅하겠는가"라고 말했다.
한 외국계 은행 딜러는 "외환시장 하루 거래량이 많을 때는 50억달러도 넘는 상황에서 5억달러 정도의 매수 개입은 '코끼리 비스킷'이나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김동윤 기자 oasis9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