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공화국 시절 운동권 학생들을 강제로 군대에 보낸 이른 바 `강제징집'은 당시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의 직접 지시에 따른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최근 발표된 인민혁명당(인혁당) 및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 사건 이 박정희(朴正熙) 정권에 의해 조작됐다는 사실 확인에 이어 과거 군사정권들이 권력유지를 위해 인권유린과 조작에 직접 관여했음을 다시 한번 증명한 것이다.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의 발표를 토대로 한 강제징집과 녹화사업의 진실을 살펴본다. ▲강제징집ㆍ녹화사업이란 = `강제징집'은 1980년 중반부터 1984년 11월까지 학원 소요 등과 관련, 제적ㆍ정학ㆍ지도휴학 처리된 대학생들을 당사자의 의사와 무관하게 학원에서 격리해 강제 입대시킨 것을 말한다. `녹화사업'은 보안사에서 1982년 9월부터 1984년 12월까지 강제징집된 인원을 대상으로 `좌경오염 방지'라는 미명으로 개별심사를 통해 순화하고 그 가운데 일부를 학원첩보를 수집하는 세칭 프락치로 활용한 정부의 공작을 의미한다. 과거 국회 대정부 질의나 1988년 5공비리 청문회에서 정부는 강제징집인원이 447명이고, 이 중 265명이 녹화사업을 받았다고 주장했지만, 당시 보안사에서 녹화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작성한 명단만도 1천121명이었고, 강제징집이 실제로 확인된 경우도 1천100여명이 넘는다고 과거사위는 설명했다. ▲전두환 지시에 국방ㆍ내무ㆍ문교 `수족'노릇 = 군사정권의 억압에 항거하던 대학생들에 대한 강제징집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직접 지시에 의해 범정부적으로 체계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밝혀졌다. 전 대통령은 1980년 10월28일 `학원소요 엄단지시'를 통해 "학원소요는 용납하지 않을 것이며, 지시위반 학교에 대해서는 먼저 한두 차례 경고하고 그럼에도 다시 지시를 위반하면 장기간 문을 닫는 등 엄격히 다스려 나갈 것"이라고 강제징집을 암시했다. 학원소요가 점점 거세진 1981년 4월2일 그는 "소요관련 학생들은 전방부대에 입영조치하라"고 구두로 국방장관에게 직접 지시하는 등 강제징집을 직접 거론했다. 그에 앞선 1980년 9월4일 계엄하 포고령 위반자 64명이 동시 입영하는 등 강제징집이 사실상 시작됐다. 주로 휴학 및 제적.정학자들을 일괄적으로 조기에 입영시킨 것이다. 전 대통령의 지시로 1981년 12월1일 `소요관련 대학생 특별조치 방침'이 마련되면서부터 소요사태 현장에서의 검거됨과 동시에 강제징집이 이뤄졌다. 이에 따라 문교부는 학원정책 심의관실을 확대해 `문제학생'에 대한 강제휴학 등 대학에 영향력을 행사했고, 각 대학은 지도휴학제에 근거해 이를 철저히 따랐다. 내무부는 학원정보 활동 및 수배자 검거를 통해 징집대상을 선별했고 그 과정에서 당사자와 가족에게 입대를 강요하기도 했고, 국방부는 입영지원서 수리 이후 입영부대 및 일시를 경찰서에 통보하는 등 정식 절차를 무시했다. 군도 강제징집자들을 `안보현실 체험'을 명목으로 적성과 특기에 무관하게 최전방으로 배치해 `특수관리'토록 했고, 보안사도 이들에 대한 신상파악 및 부대장에게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했다. 이 같은 과정에서 본인의 의사를 반영하지 않는 기본권 침해는 물론 일부는 징집연령, 신체등위 등을 따지면 징집대상에서 제외됨에도 불구하고 입영한 사례도 나타났다고 과거사위는 덧붙였다. ▲고시출신 장교까지 동원해 `녹화사업' = 보안사는 1982년 5월17일 강제징집자 증가 등 좌경사조 확산을 이유로 `좌경 의식화 활동지침'을 마련했고, 그 해 9월6일 전담공작과(심사과)를 신설했다. 이 때부터 보안사는 `문제학생'들을 심사, 순화한 뒤 프락치로 활용해 대학내 이념서클을 적발하기로 하고 같은 해 11월17일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했다. 당시까지 강제징집돼 복무 중인 병사 595명 전원을 대상으로 1년간에 걸쳐 심사,순화교육을 실시하고 이를 담당할 부대원들을 보안사에서 강제징집자 교육요령, 프락치 활용방법 등을 집중 교육시키는 것이 바로 그 계획이었다. 심사는 서울 소재 주요 대학의 경우 A급 대상자들은 심사과에서 직접 담당하고 나머지는 예하 보안부대에서 실시했다. 특히 이듬 해인 1983년부터는 배경지식이 구비된 전문인력 확보를 위해 각 군에 복무 중인 고시출신 및 사회과학 전공 단기장교 23명을 차출해 심사장교 임무를 부여하는 치밀함을 보이기까지 했다. 심사결과 순화됐다고 판단되는 병사에게는 프락치 임무를 부여했고, 이로 인해 당사자들은 동료를 배신해야 하는 부담으로 고통이 가중됐다고 과거사위는 설명했다. ▲밝혀져야 될 것들 = 국방부 과거사위의 이날 발표는 국민의 알권리 충족을 위한 중간조사결과 발표 형식으로 완전한 조사결과가 아니기는 하지만 이를 바탕으로 향후 추가로 밝혀져야 할 부분들도 적지 않은 것으로 지적된다. 우선 녹화사업을 지시한 주체가 밝혀지지 않고 있어 어느 선에서 이를 입안했는 지를 과거사위는 밝혀내야 한다. 강제징집 자체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직접 지시에 의한 것으로 밝혀진 만큼 이와 연관된 녹화사업 역시 당시 청와대 등 최고위층이 연관되어 있을 개연성이 높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또 과거사위는 보안사 심사과가 1984년 12월19일부로 해체되어 그 이후에는 녹화사업이 없었다고 단언했지만, 과연 하나의 담당과가 폐지됐다 해서 `문제정권'이 이를 일거에 그만뒀겠느냐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특히 녹화사업은 그 시행과정에서 6명이 의문사하면서 재야 및 야권 등에서 정치쟁점화하자 마지못해 폐지된 것인 만큼 또다른 부서에서 이를 편법적으로 맡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1980년대 후반까지 각 대학에서 프락치 의혹이 끊이지 않았던 사례를 보면 쉽게 수긍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이와 함께 과거사위는 현재 대략적인 숫자만 거론되고 있는 녹화사업 대상자들을 정확히 파악해 진상규명과 함께 이들에 대한 보상작업을 조속히 실시해 이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줘야 하는 책무도 안게됐다. 강제징집자 1천121명 중 900여명과 정상입대자 중 300여명 등 모두 1천200여명이 녹화사업 대상자였던 것으로 과거사위는 추정하고 있지만 정확한 명단은 아직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김귀근 이상헌 기자 threek@yna.co.kr honeybe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