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잘못 읽어


굽어진 어깨가


덕수궁의 담을 끼고 가면,


이렇게도 어울리는


지금은 수치와 겸양의 계절…


누구를 시새우고 무엇을 탓하랴,


모든 사람에 앞서 내가 먼저 외로워지는


시간… 포도를 걸으면,


언어는 낡은 자기처럼 비어있고,


추상의 신은


추상의 신들도


옛부터 이런 계절을 위하여 정숙히 존재하는가!


-김현승 '가을의 포도' 부분




가을을 보내는 마음은 늘 스산하다.


얼마 남지 않은 올해를 온전히 내 것으로 돌려놓기 위해 안간힘을 써봐도 돌아오는 것은 회한과 반성뿐이다.


죄는 인간이 짓지만 용서는 신의 몫이라고 했던가.


가을이 겸양의 계절인 이유는 혹독한 겨울이 눈부릅뜬 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옳고 그른 게 뭐고 삶은 또 뭔지 다시 생각하게 하는 시간.늦가을 찬바람 맞으며 낙엽 깔린 포도위를 걸어보면 그 대답의 한 자락이나마 얻을 수 있을까.


이정환 문화부장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