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의 나라'인 그리스에서도 델피는 '신탁의 도시'로 불린다.


일찍이 기원전 13세기 때부터 아폴론 신의 신탁을 받아 국가의 운명을 결정지었던 성역이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 나오는 유명한 트로이전쟁 때도 총사령관이었던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이 트로이로 떠나기 전에 이곳에서 아폴론 신의 계시를 얻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델피는 아테네에서 북서쪽으로 170km 떨어져 있어 자동차로 4시간 정도 가야 한다.


그래도 아테네에서 하루 만에 다녀올 수 있는 곳이어서 방문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그리스는 높은 산이 거의 없는 평지지만,델피로 가는 길은 여러번 작은 산을 넘어야 한다.


특히 아폴론 신전 터가 있는 파르나소스 산 정상까지는 길이 비좁고 가파르며 꽤 많이 걸어 올라가게 돼있다.


현지인은 아마도 신에 대한 경외감을 갖게 하려고 일부러 길을 어렵게 만든 것 같다고 설명한다.


구불구불 정상으로 이어지는 길 바닥에 깔린 조약돌들은 반질반질 윤이 나고 미끄러워 얼마나 많은 방문객들이 다녀갔는지 짐작하게 한다.


신전 터로 향하는 '참배의 길' 도중에는 '옴파로스'(배꼽이라는 뜻)라는 이름을 가진 위쪽이 뾰족한 고깔 형태의 돌멩이 한개가 시선을 끈다.


이 돌은 당초 아폴론 신전 내실에 놓여 있었으며 신탁이 이뤄졌던 장소였다.


그런 만큼 이 돌에는 아폴론의 아버지로 '신들의 신'으로 불리는 제우스와 그의 아버지 크로노스가 등장하는 섬뜩한 신화가 전해 진다.


크로노스는 자기보다 강한 아들이 태어나 자신을 물리칠 것이란 예언을 듣고 아들이 태어나는 족족 모두 잡아먹었다고 한다.


그러나 제우스만은 어머니 레아가 몰래 감춰두고 대신 커다란 돌을 보자기에 싸서 아기라고 속여 크로노스는 이 돌을 삼켰다.


아버지 눈을 피해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자란 제우스는 예언대로 크로노스를 죽이고 뱃속에 있던 돌과 다른 형제들을 모두 토해내게 했는데 그 돌이 바로 옴파로스라는 얘기다.


델피는 고대 세계에서 그리스는 물론 전 세계의 중심으로 여겨져 '세계의 배꼽'이라고도 불렸는데,이 이름은 바로 옴파로스 돌과도 관련성이 깊다.


이 돌을 지나쳐 신전 터에 이르기 전까지 길 양쪽에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들과 인접국에서 아폴론 신의 신탁을 받는 대가로 봉납한 제물들을 보관했던 보고들과 기념비 흔적들이 즐비하다.


높은 산을 배경으로 한 신전 터는 6개의 높다란 돌기둥과 대제단,몇개씩의 돌무더기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성역답게 신비로운 분위기가 강하게 느껴진다.


나뒹구는 돌 하나하나도 거의 3000년 전에 만들어진 역사적인 유물들이다.


길이 60m,폭 23m인 신전을 한 바퀴 돌다보면 신탁을 받기 위해 제단에 희생양을 바치는 왕·장군들의 참배 장면과 여사제들의 모습이 떠올려지는 듯하다.


신전 위쪽으로 걸어 올라가면 고대 극장이 있다.


델피에서는 4년마다 한번씩,아마도 최대 축제였을 '피티아 제'가 개최됐는데 이곳에서 각종 연극과 스포츠 행사가 열렸다고 한다.


기원전 4세기에 지어졌다는 이 극장은 보존이 잘 돼있어 지금도 여름철에는 연극이 공연된다.


이곳에서 내려다 보는 신전은 주위의 산과 숲,산 아래쪽으로 훤히 뚫려있는 풍경과 어울려 장엄하고 신비한 느낌을 더해준다.


당시 신전 내에 있던 유물들은 인근 델피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박물관은 모두 11개의 전시실로 구성돼 있다.


왼쪽 팔이 떨어져 나가기는 했지만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된 실물 크기의 청동 마부상과 기원전 6세기에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날개 달린 스핑크스,로마시대까지의 예술 변천사를 보여주는 각종 조각상 등을 만날 수 있다.


델피에서 아테네로 돌아오면 아무래도 맨 먼저 파르테논 신전으로 발길을 향할 수밖에 없다.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 1호'로 지정한 이 신전은 아테네시 한복판에 우뚝 솟아 있는 아크로폴리스 언덕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어 시내 어디에서건 쉽게 눈에 띈다.


고대 아테네 도시국가의 수호신이었던 아테나 여신을 모시기 위해 지어진 파르테논 신전은 그 자체가 위대한 예술품이다.


둘레가 160m에 이르는 웅장한 규모도 그렇지만 가공된 대리석으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직경 2m,높이 10m의 46개 기둥들과 그 기둥 및 건물 윗부분에 새겨져 있는 부조와 조각상들을 올려다 보노라면 절로 찬사가 흘러 나온다.


이 신전은 아테네 전성시절 공화군주였던 페리클레스가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당대의 건축가 이크티노스를 시켜 10년에 걸쳐 기원전 438년에 완성했다고 한다.


신전은 멀리서 보면 정육면체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곡선과 곡선을 조화시켜 만든 것이다.


기둥만 해도 수직으로 곧게 뻗어있는 것처럼 보이지만,실은 안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고 기둥 자체도 위로 가면서 가늘어진다.


기둥이 안쪽으로 기울어진 것은 지붕의 중량을 버텨내기 위한 것이고,바닥이 올라간 것은 물이 잘 빠지게 하려는 배려라고 현지 가이드는 설명한다.


파르테논 신전은 터키가 그리스를 지배하던 시절에는 한때 화약고로 이용됐다고 한다.


특히 1687년에는 베네치아 군대가 파르테논에 있던 터키군을 대포로 공격하는 과정에서 신전 내 화약고가 폭발하는 바람에 대화재가 48시간 동안 발생해 신전 건물의 상당 부분이 파손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신전을 정면에서 보면 오른쪽 옆 부분의 기둥들과 지붕이 없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신전은 자주 이곳저곳을 수리해 공사가 그칠 날이 없다고 한다.


신전은 저녁이 되면 관리 문제로 출입이 통제되지만,밤에는 찬란한 조명을 받아 시내에서 올려다보면 장관을 연출한다.


아크로폴리스 언덕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필로파로스 언덕에서 이 신전을 보는 것도 멋지다.


파르테논 신전에서 출구로 나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6인의 소녀상을 기둥으로 한 에렉티온을 만나게 된다.


기원전 408년에 지어진 것을 복원한 모조품으로 진품은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출구 쪽으로 더 나오면 왼쪽으로 기원후 161년에 당시 대부호였던 이로데스가 지어 아테네시에 기증했다는 아티쿠스 오데온이란 극장이 있다.


6000개의 객석을 갖고 있는 이 극장은 최근에 복원돼 여름철이면 음악회와 그리스 고전극 등이 열린다.


몇해 전에는 한국의 세계적인 오페라 가수인 조수미씨가 공연을 가져 현지 교민들 사이에 큰 자랑거리가 됐다고 한다.


아크로폴리스 언덕을 내려오는 길에는 옛 시장터인 아고라가 있고 부근에는 사도 바울이 아테네 시민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했던 장소로 유명한 아레오파구스 언덕이 있다.


밤에 이 언덕에서 아테네 시내를 내려다보면 그야말로 황홀경에 빠져들어 이곳에서 밤늦게까지 기타를 치며 노는 젊은이와 연인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이 때문인지 이곳으로 올라가는 길이 무척 미끄러워 밤에 찾아 오는 관광객 중에는 발목을 삐는 일도 자주 생긴다고 현지 가이드는 귀띔했다.


델피·아테네(그리스)=문희수 건설부동산부장 m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