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번쩍 뜨이는 영화가 등장했다. 발견의 기쁨이다. 한국 상업 멜로영화의 새로운 장이 펼쳐졌다. 물론 이 영화는 새롭지는 않다. 할리우드 영화 '러브 액츄얼리'가 충무로에 안겨준 충격으로 인해 탄생된 영화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커플이 각기 다른 종류의 사랑을 전개하는 와중에 그들이 모두 하나로 연결된다는 매력적인 구조의 사랑 이야기. 시나리오가 웬만큼 완벽하지 않으면, 또 편집의 묘미가 살아나지 않으면 그 매력을 충분히 발산하지 못하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 그러나 반대로 그 위험을 극복하면 혀의 미세한 세포를 하나하나 자극하는 절묘한 맛을 느끼게 된다. 일단 돋보이는 것은 영화가 완벽하게 수미쌍관에 성공했다는 점이다. 일주일이라는 짧다면 짧은 시간을 배경으로 여섯 커플의 서로 상관없는 러브 스토리를 전개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영화는 중심을 똑바로 잡고 도입부의 화두를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솜씨를 보였다. 도입부 TV 토론 프로그램에서 "영화가 모방범죄를 조장한다"고 주장하는 형사 황정민을 무식한 인간으로 취급하던 정신과의사 엄정화가 후반부 "자기 가족이 그런 일을 당해봐야 안다"는 그의 말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 바로 그것. 단선적인 구조에서도 조금만 삐끗하면 출발과 끝의 조화가 어그러지기 마련인데 이 영화는 보기좋게 그것에 성공했다. 두번째로 여섯 커플의 개성을 십분 살리면서 그들의 인연을 자연스럽게 엮어냈다. 가난한 커플, 극과 극의 커플, 중년의 커플, 아버지와 딸, 스타와 수녀 그리고 동성애 커플. 이들은 각자의 작은 우주를 형성해가면서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큰 우주의 구성원이 된다. 무심결에 마주치고 스쳐가는 인연이 하나의 커다란 세상을 만들어내고 있음을 우리는 스크린을 통해 확인하게 된다. 각 커플의 에피소드는 눈물과 웃음, 감동을 넘나들며 오감을 자극한다. 관객에게 '골라보는 재미'를 안겨주는 것. 배우들의 고른 호연이 이를 뒷받침하는데 특히 황정민이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하며 "이 여자가 왜 이래"라고 툭툭 내던지는 모습은 극장안을 폭소의 도가니로 만든다. 영화를 보고 나면 단연 황정민의 잔상이 오래도록 남을 터인데, 그의 연기가 이 영화의 오락성을 책임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면 그동안 코미디를 장악하던 임창정이나 김수로는 정색을 하고 슬픈 연기에 도전해 눈물샘을 자극한다. 코미디에 가려있던 둘의 내공이 드러나는 순간. 이렇듯 영화는 바쁜 와중에 배우의 기존 이미지를 배반하는 도전까지 병행해 그마저 성공했다. 로맨틱 코미디 연기에 있어서는 이제 경지에 오른 엄정화는 시종 의연했고, 중년의 로맨스를 꾸려나간 주현과 오미희는 생각지도 못했던 감동을 안겨준다. 특히 막판 '시네마천국'을 본뜬 '너를 위한 영화'는 청춘 남녀의 사랑 부럽지 않게 로맨틱하다. 또한 반전의 묘미까지 안겨주는 천호진의 절제되고 묵직한 연기는 스크린에 힘을 실어준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연기들이 비빔밥 속 싱싱한 재료처럼 펄떡인다. 세번째로 영화는 단순한 사랑 놀음이 아닌, 인생을 그리는데도 주의를 기울였다. 오래된 극장은 화려한 멀티플렉스로 탈바꿈하기를 강요받지만 오래 묵은 것의 미덕은 분명히 있다. 가난 때문에 사람들은 생을 포기하고 낙태를 하지만 그 와중에도 희망은 움튼다. 나날이 성장하는 영상과 스타 파워의 이면, 성적 소수자의 비애와 근원적인 인간애가 전혀 부담스럽지 않게 그려진다. 부지불식간에 피부에 스며드는 온기처럼 마음을 꾹 누른다. '러브 액츄얼리'가 별다른 걱정이 없는 영국 중산층의 사랑에 대한 판타지를 그렸다면 이 영화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려움도 극복하는 한국인의 사랑을 조명했다.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로 데뷔한 민규동 감독은 원작 시나리오를 각색했고 자신의 솜씨를 발휘해 매력적인 영화를 만들어냈다. 2시간 10분의 러닝타임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10월7일 개봉, 15세 관람가. (서울=연합뉴스) 윤고은 기자 pretty@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