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2006.04.03 05:19
수정2006.04.03 05:21
청와대가 일부 정치권과 시민단체에서 '삼성 봐주기 의혹'을 제기한 정부의 '금융산업 구조개선에 관한 법률'(금산법) 개정안 작성 경위에 대해 재정경제부와 금융감독위원회 공무원들을 내사한 것으로 밝혀져 파문이 일고 있다.
경제정책 결정 과정에 대한 이번 조사가 청와대 정책 라인이 아닌 공직 기강 등을 담당하는 민정수석실 주도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재경부 등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금산법 개정안이 지난 7월 노무현 대통령이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통과됐음에도 뒤늦게 청와대가 내사를 벌인 데 대해 경제계에서는 "정부가 스스로 내린 결정까지도 시민단체 눈치를 보는 게 말이 되느냐"는 비판이 확산되고 있다.
경제부처 공무원들 사이에서도 "청와대가 도대체 누구 말을 더 믿는 거냐"며 내심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김만수 청와대 대변인은 23일 "금산법 개정안이 국무회의에서 통과될 때 논란이 있었고 일부 국회의원과 시민단체에서 문제 제기가 있어 경위를 파악하라는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다"며 내사 사실을 확인했다.
김 대변인은 "그동안 당사자들을 대상으로 확인한 내용을 정리하고 있는 단계"라며 "아직 판단의 문제가 남아 있다"고 말했다.
민정수석실이 나선 이번 내사는 재경부 금융정책국,금감위 감독정책 1·2국의 국·과장들을 중심으로 진행된 것으로 알려졌다.
조사를 받은 재경부와 금감위 당사자들은 조심스런 반응을 보이고 있다.
재경부 관계자는 "금산법 개정안 마련 과정에 대해 민정수석실에 설명을 한 것이지 강압적인 조사를 받은 건 아니다"고 밝혔다.
박대동 금감위 감독정책1국장도 "그냥 자료를 달라고 해서 줬을 뿐"이라며 "내사를 받았다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재경부와 금감위 내부에선 민정수석실 조사에 당혹스러움과 함께 불만스런 표정을 짓고 있다.
참여연대와 정치권에서 '삼성과 유착한 경제 관료들이 삼성을 봐준다'는 의혹을 제기한 데 대해 청와대가 실제 조사까지 벌이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는 반응이다.
한 관계자는 "청와대가 도대체 누구 말을 더 믿는지 모르겠다"며 "증거도 없는 시민단체의 의혹 제기를 갖고 공무원들을 조사한다면 누가 소신껏 일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다른 경제 관료는 "이미 차관회의와 국무회의 등을 모두 정식 통과한 법률 개정안을 놓고 문제삼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며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면 당시 의결을 보류하고 시비를 가렸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물론 일각에선 이번 청와대 조사가 시민단체와 정치권의 의혹 제기를 조기 차단하기 위한 것이란 해석도 있다.
그러나 정책결정 과정에서 경제 관료와 기업 간 유착 의혹에 대해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내사를 벌인 것 자체가 극히 이례적인 일이어서 파장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허원순.차병석.이성태 기자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