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으로는 독도에서 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갈매기똥도 없으니 폭파해버리자고 말한 일이 있다" 1962년 11월13일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일본 외상과의 회담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르던 김종필(金鍾泌) 전 중앙정보부장이 기자들에게 던진 말이다. 이 한마디로 김 부장은 독도 폭파 발언자라는 오명을 여태껏 뒤집어 쓰고 있다. 26일 공개된 한일회담 문서작업에 참여했던 민간전문위원인 전현수 경북대 교수는 "회담록을 자세히 보면 지나친 확대 해석으로 이런 인식이 생겼음을 알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전 교수는 "당시 회담록 전체의 문맥이나 독도문제에 대해 비판여론이 비등했던 국내사정을 감안한다면 발언의 진의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오히려 독도를 일본땅이라고 끝까지 우기면서 우리측의 단호한 반대에 부닥친 일본측 회담 관계자가 독도는 무가치한 섬이기 때문에 아예 폭파해버리자고 했다. 그럼 공개 문서를 통한 한일회담의 독도 공방을 자세히 살펴보자. 1953년 4월부터 7월까지 지속된 제2차 한일회담 어업분과위원회에서 일본이 평화선을 부정하기 위해 독도가 일본 영토이며, 일본 영토까지 포함시킨 평화선은 불법적인 획선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독도 문제가 제기됐다.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쟁점화된 것은 1962년 2월22일 김종필 당시 중정부장과 고사카 젠타로(小坂善太郞) 일본 외상의 회담에서부터였다. 고사카 외상은 "독도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고 한국측이 응소하길 바란다"고 제의하자 김 부장이 "하찮은 섬 문제를 일본이 심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거부한 것이다. 고사카 외상은 그 해 3월12일 열린 최덕신(崔德新) 외무장관과의 회담에서도 "국제사법재판소와 같은 공정한 제3자에게 조정을 의뢰하자"며 "현안이 해결되더라도 영토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국교정상화는 무의미한 것이다"고까지 했다. 최 장관이 "그렇게 하면 국민에 대한 책임을 면치 못하고 중대한 과오를 지적당할 것"이라며 물러서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이런 고사카 외상의 발언에 대해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전 수상은 그 해 8월2일 배의환(裵義煥) 주일대사와의 면담에서 "몰상식한 일"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같은 해 9월3일 일본 회담 관계자는 독도 폭파 발언을 하게 된다. 한일예비절충 제4차회의 회의록에 따르면 이날 오후 일본 외무성 제235호실에서 열린 회의에서 이세키 유지로 아세아국장은 "독도는 무가치한 섬이다. 크기는 히비야 공원 정도인데 폭발이라도 해서 없애버리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이세키 국장은 그러면서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를 다시 한 번 제의했고, 우리측은 국교정상화 후 별개로 취급하자고 맞섰다. 그 해 10월21일 다음 외상인 오히라는 역시 김 부장과의 회담에서 "일본이 제기한 국제사법재판소에 응소해주기 바란다"고 했고, 김 부장은 "독도문제는 회담초부터 한일회담과 관계없던 것을 일본측에서 공연히 끄집어 낸 별개 문제이기 때문에 할 수 없다"며 "양국 국교가 정상화된 후에 시간을 가지고 해결해 나가는 것이 현명한 줄 안다"고 거부 의사를 분명히 했다. 11월13일 제2차 김종필-오히라 회담록에 따르면 오히라 외상이 또다시 국제재판소 문제를 들고 나오자 김 부장은 "한국민의 감정을 격화시킬 뿐"이라며 제3국 조정에 맡김이 어떻겠느냐고 시사하는 발언을 했고, 오히라 외상은 생각해볼만 한 안이라며 제3국으로 미국을 지적하고 연구해 보겠다고 답했다. 이 같은 김 부장의 `3국조정' 발언에 대해 당시 주일대사관측은 "일측의 강력한 요구에 대해 몸을 피하고 사실상 독도문제를 미해결 상태로 유지하기 위한 작전상의 대안으로 시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다 김 부장이 13일 귀국 기자회견을 하네다 공항에서 가지면서 기자들의 질문에 "농담으로는 독도에서 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갈매똥도 없으니 폭파해버리자고 말한 일이 있다"고 한 것이다. 이렇게 공방을 거듭하던 독도문제는 회담 막바지인 1965년 일본측이 분쟁처리에 대한 교환공문 의정서에 이 문제를 포함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면서 독도가 분쟁지역임을 명시하려 했으나 회담 서명 당일인 6월22일 일본측에서 교환공문상에서 독도라는 글자를 삭제함으로써 봉합된 채 막을 내렸다. 1963년부터 조약과장과 주일대사관 정무과장으로 회담에 참가했던 오재희(吳在熙) 전 외무차관은 지난 1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일본은 관철시키려 했던 교환공문상의 `독도를 포함한 양국간의 분쟁은'에서 `독도를 포함한'이라는 문구를 서명장에서 삭제했다"며 "이는 우리측의 반발이 심하자 당시 사토 총리가 협정문 초안을 가져오라고 지시, 관련 문구를 직접 펜으로 그어버린 것"이라고 증언한 바 있다. 한편 우리 정부는 1950년 10월 일본의 패전으로 인한 우리나라의 승전국 지위확보에 대비, 간도(間島)가 우리 영토라는 자체적인 지침을 마련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한 장짜리 필사본으로 당시 주일대표부가 자체적으로 작성한 이 문서는 "간도지방은 우리영토"라며 일본과 청(淸)이 베이징(北京)에서 체결한 `간도에 관한 협약'을 통해 타국의 영토를 자기 마음대로 획정했다고 적고 있다. 문서는 "우리는 대일강화조약에서 이 실지를 회복하여 여사한 불법조약의 무효를 선언한다"고 강조했다. 이 혁(李 赫) 외교부 아태국장은 26일 "1951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서 우리나라의 전승국 지위 획득을 상정한 주일대표부 내부 검토안"이라며 "전승국 지위획득에 실패했기 때문에 이후 외교교섭에서 활용된 바는 전혀 없다"고 말했다. 반기문(潘基文) 외교부 장관은 작년 10월22일 "간도협약은 법리적인 측면에서 무효"라고 확인한 뒤 "그러나 법리적으로 무효라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아니며 따라서 간도협약문제와 간도 영유권 문제는 분리해서 접근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서울=연합뉴스) 이상헌 기자 honeybee@yna.co.kr